한 많은 10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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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7-18 13:05 조회5,30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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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은 터질 듯 숨이 막혀 올랐다. 가슴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내 눈이 편지에서 떨어지는 순간 고개를 든 내 입에서는 "허ㅡ" 하는 찬 웃음만 나왔을 뿐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았다.
시계는 8시 5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만 일찍 받았던들 8시 15분 차를 탔었을 것을……. 그랬으면 장례식에라도 참석할 수 있었을 텐데. 도대체 내 마음은 무얼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조금만 빨리 알았더라도. 지금 청량리로 간다면 탈 수 있을까?'
경성역에서 청량리까지 가는데 기차는 30분 이상 걸린다. 이제라도 당장 청량리로 가면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시계는 벌써 9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나는 곧 학교차 운전수를 찾았다. 15분 동안에 청량리까지 갈 수 있느냐는 물음에 표정 없는 운전수의 말은 단호했다.
"어렵습니다. 물론 사람도 다니지 않는 큰 길이라면 최대속력으로 혹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큰 길이라도 십자거리에서마다 마음대로 갈 수 없으니 15분에는 어림도 없습니다."
그때 나는 다시 다그쳐 물었다.
"그러면 지금 출발해서 창동역까지 가서라도 그 차를 탈 수 없을까요?"
"그렇게 하면 시간에는 될 지도 모르죠. 그렇지만 거기까지 대절이라면 20원은 내야할 걸요" 하였다.
"그래요? 그럼 바로 떠납시다. 20원 낼 테니."
그랬더니 운전수의 대답은 너무도 엉뚱했다. 곧 시내에서 모셔올 손님이 있어서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때에야 비로소 나는 깨어난 듯 정신이 들었다. 아무래도 갈 수 없다는 생각이 몽롱한 나를 깨운 것이었다. 문득 알 수 없는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 이런 큰 일에 전보 한 장도 보내지 않았단 말인가?'
그리고 의아스런 내 눈은 다시 등사된 글자 위를 더듬고 있었다. 틀림없는 이 형(李兄)의 부고였다. 전보 한 장 보내지 않았다는 섭섭함은 순간 노여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모르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발걸음은 강의실 문을 들어서 있었다. 홧김에 들어온 깃이었으리라. 만 가지 온갖 생각과 흥분을 억누르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눈앞에 교수가 왔다 갔다 하는 것만 짐작될 뿐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책상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당장 일어서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늦게 들어온 주제에 금방 다시 일어서서 나갈 수도 없었다. 그냥 얼굴을 파묻은 채로 그 시간을 보냈다. 씩씩거리고 있는 나에게 마치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주섬주섬 책을 챙긴 나는 교실을 나와 사무실로 갔다. 기차 할인권을 한 장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길을 걷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저녁차에라도 갈까. 까짓 돈이나 10원 보내고 말까. 장례식까지 끝난 다음에 가면 뭘 한단 말인가. 정말 돈이나 좀 보내고 말까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돈이나 보내면 또 뭘 하나 당장 내일이라도 가서 무덤에라도 찾아가 실컷 울기라도 하고 싶었다. 방바닥에 누워서 목사님이 써주셨던 글과 얼굴을 바라보며 하염없는 눈물을 흘리던 나는 문득 일어났다.
한참 후 흥분이 어지간히 가라앉았을 때 다시 아까 생각으로 되돌아갔다.
'원산에 갈까, 말까?'
차는 오후 5시 20분 경성을 떠나 밤 11시에 원산에 도착하는 특급열차가 하나 있을 뿐이다. 장례가 3시인데 밤 11시에 도착할 것을 생가하면 금세 가기가 싫어졌다. 그러나 생각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가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가슴을 온통 뒤엎고 있었다. 정말 입안이 바짝바짝 마르고 안타까움만 더해졌다. 온종일 정신 빠진 사람처럼 거리를 헤매는 내 머리에는 이 두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갈까, 말까?' 그러나 시간은 안타까운 마음을 곁눈질 한번 해보지 않고 정확히 흘러가고만 있었다.
오후 5시. 마음은 끝없이 다투고 있었지만 그래도 발걸음은 경성역을 향해 종로를 걷고 있었다. 걷고 걸어서 경성우편국 근처에 이르렀을 때는 거리를 향한 커다란 시계가 5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젠 정말 머뭇거릴 때가 아니다. 가슴이 바짝 조여 들었다.
'가야 하느냐, 가지 않아야 하느냐?'
좌우간 지금은 정해야 한다. 바로 그때 시계바늘이 크게 한걸음을 내딛는다. 내 가슴도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전차가 온다. 가려면 지금 타야 한다. 그렇더라도 시간에 미칠지, 늦을지 모른다.
'자 어떻게 하느냐?'
등줄기에 땀이 흐르고 입술은 바짝 마른다. 그런데 나는 이미 전차 안에서 흔들리고 있었다.
'타고 가면서 생각해보자.'
전차를 탄 때가 5시 7분이었다. 이상하게도 가슴은 더욱 고동을 치며 뛴다. 가슴속은 허공을 오르내리는 것처럼 너울거렸다.
전차가 멎었다. 경성역전에 닿았을 때가 5시 19분. 나는 뛰었다. 아직 가는 건지, 가지 않는 건지 결정을 못했다. 그런데도 막 뛰었다. 표 파는 데까지 왔다. 할인권과 돈을 들여 밀었다. 할인권에다 왕복이기 때문에 시간이 더 걸렸다. 표 파는 아가씨도 어쩔 줄 모르고 몹시 서둘렀다. 표를 받아 들었을 때, 벌써 발차를 알리는 벨 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막 딛히려는 개찰구로 뛰어들었을 때, "안돼, 안돼" 하던 역원은 표를 돌려주며 빨리 뛰라고 재촉하였다. 뛰어가는 내 귀에 "어서, 어서" 하는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벨은 쉬지 않고 울리고 있었다. 내 눈에 시커먼 연기를 푹푹 토하고 있는 기차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는 그 기차만 보면서 뛰고 있었다. 개찰구에서 회령행 기차를 타는 데는 유달리도 멀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정신은 아찔해 지고 눈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뛰었다. 거의 가까이 갔을 때 지금까지 기적을 울리며 나를 기다리던 기차가 숨을 내뿜으며 움직이기 시작하였다. 나는 손잡이를 붙잡고 겨우, 정말 겨우 발을 올려 놓았다. 오르고 보니 역원 몇 사람이 내 등을 붙들고 있었다. 차에 올라선 자신을 발견하자 곧 정신이 드는 것을 느꼈다. 땀은 옷을 흥건하게 적셨다. 끊어질 듯한 누더기 같은 숨이 헐떡거리며 목구멍을 넘나들고 있었다. 그래도 차는 움직이고 있었다.
차츰 역 구내를 벗어난 기차는 양 쪽의 집들을 하나 둘 뒤쪽으로 밀어내며 나가고 있었다. 아득한 혼미 속을 헤매던 눈에 서울거리가 들어왔다. 다시는 못 볼 마지막 길 같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나는 이제 죽는다. 다시는 여기에 올 수 없다. 이렇게 무리한 몸뚱이, 아마 무덤에서 기절할거야. 그리고, 그리고는 피를 토하고 나는 죽을거야. 나는 여기 경성을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거야.'
마음의 방황은 끝이 없었다. 온 몸에서 식은 땀이 또 한번 쑥쑥 쏟아졌다. 숨소리는 자꾸만 거칠어졌다.
차는 한강을 끼고 서울을 안고 돈다. 서빙고, 왕십리, 청량리…….
'여기가 경성에서 발을 내디딜 수 있는 마지막 역이지.'
서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하염없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렀다. 겨우 차에 매달리자마자 곧 주저앉은 나는 일어서고 싶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은 일어설 힘도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주저앉은 채로 몇 정거장인가를 지났다.
이제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겨우 일어서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차는 그냥 간다. 우주는 컴컴해오는데……. 찻간에 들어가서도 기운이 없어 머리를 들 수가 없었다. 얼마 동안 쓰러져 있다가 고개를 들었을 땐 동편 하늘이 훤해왔다. 아마 달이 떠오르는 모양이었다. 가만히 날짜를 꼽아보다가 그만두었다. 8월 15일, 바로 추석이다. 물끄러미 동편을 향해 열린 내 눈에 한쪽 뺨을 살짝 내어놓은 달이 보였다. 그때 기차가 긴 기적을 울리며 어스름한 달빛 속을 달려갔다. 기차는 월정리역을 지나고 있었다.
그 달, 그 정거장을 눈으로 보며 애타는 듯한 긴 기적소리를 들었을 때 알지 못하는 크고도 야릇한 느낌이 나를 휘감았다. 그 순간의 이상한 기분은 그 후에도 늘 잊혀지지 않고 돌이켜 보아 지곤 하였다. 기차는 월정리를 지나 쉬지 않고 달리기만 했다. 달을 응시하던 내 눈은 그 달 속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유심히 바라보았다. 눈에서 주룩주룩 눈물이 흘러내렸다.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곁에 앉은 사람들의 눈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비오듯 흐르는 눈물을 어찌 막을 수 있으리오.
기차가 삼방협역을 들어섰다. 아, 이 정거장, 저 안쪽에 있는 동네, 동네 곁의 그 집, 그리고 그 방, 그 자리. 마침내 나는 목을 놓아 울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마침 옆에 앉은 남녀가 축음기를 틀어놓고 있어서 승객들은 모두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큰 소리로 한참을 울었다. 운 것이 아니라 나의 영혼이 한 조각씩 부스러져 나가고 나는 죽음을 향해 느리게 움직이는 기분이었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실컷 울었다. 얼굴 꺼풀이 버석버석해지고 목이 아파왔다. 사지는 부들부들 떨리고 온몸은 깊은 물속에 푹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나는 엎드린 채였다. 누운 것도 아니고 앉은 것도 아니고 자지도 않고 그렇다고 잠을 아주 안 자는 것도 아니었다. 석왕사를 지났다. 안변, 갈마, 배와역을 지나 어스름한 달빛 속을 달려갔다.
벌써 원산 시가지가 멀리 바라보였다. 기차는 긴 기적을 토하며 달려 들어갔다. 불현듯 목사님 모습이 떠올랐다. 나는 왼편 통로에 매달렸다. 그리고 산제동, 광석동 쪽을 뒤꿈치를 들며 바라보았다. 마치 이용도 목사님이 문을 열고 서서 차 타고 오는 나를 기다리는 것만 같았다.
차차 멎었다. "겐잔(元山), 겐잔" 하는 스피커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에서 내렸다. 밤이 늦어 버스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전에 한번 걸었던 기억을 되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발걸음을 광석동으로 돌리며 마음을 곧게 먹었다.
'그까짓 것, 집으로 들어가서는 죽어도 울지 않을 테야. 한바탕 실컷 나무라고 내일 새벽차로 돌아 갈 테야.'
걸음이 빨라졌다.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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