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경사 내리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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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5-18 16:50 조회4,9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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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7일 평양노회의 금족령으로 인한 상처가 채 아물기 전인 10월 말~11월 초, 이용도를 결정적으로 넘어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10월에는 이용도의 금족령을 반대하는 노회원들이 43%나 되었으나, 최근 한 사건에서는 그런 반대가 있기 어려웠다. 이용도가 드디어 실책을 한걸까? 변종호는 이를 '한준명 사건'이라 일컫는다.
한준명 사건
고요히 이용도 목사의 일생을 관찰하고 분석할 때 1932년 10월까지 ㅡ 안주 해주 집회 ㅡ 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말 들을 것이 하나 없고 책 잡힐 것이 절대로 없었다. 황해노회, 평양노회 등에서 무슨 소리를 한대도 그것은 시기, 질투가 아니면 못난 인간들의 생트집이지 말이 되지도 않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10월말에 이르러 한 사건이 생겨서 용도 목사에게 욕을 뒤집에 씌우게 되었으니 그것은 세상에서 말하는 한준명 사건, 즉 한준명 등의 예언 운동 ㅡ 입류(入流)라고도 함 ㅡ 사건이 그것이다.
원산에서 기도생활을 정성되게 하던 한준명은 예언을 하기 시작했다. 한준명은 평양으로 와서도 예언을 하게 되었다. 평양에 예언자가 나타났다는 소식이 들리자 평양의 지식인, 열신(熱信)분자 등이 모여서 그 예언을 듣고 혹은 감탄, 혹은 검토하다가 나중에는 단단히 달라붙어 질문, 시험, 검증까지 하게 되었다. 미래에 대한 것은 그냥 들을 수밖에 없지만 현재에 관계되는 것은 앞뒷굽을 맞춰 보기도하고 사실인지 아닌지 검증해보기도 하였다. 했더니 맞는 것도 있지만 안 맞는 것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 문제를 일으켜 거짓 예언자, 사기꾼, 요술쟁이라고 공박을 하게 되고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라고 때려 죽인다고 몽둥이를 들고 나서기도 하였다. 이에 한준명은 할 수 없이 원산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한준명은 이용도의 파당이라고 하면서 한준명의 욕은 잊어버린 듯이 그만두고 용도를 몰아세우고 또 치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걸리지를 않아서 걸지를 못하고 트집 잡을 것이 없어 생트집을 잡아서 공박하던 차인데 이런 일이 생기니 교묘히 결부를 시켜서 이 기회에 용도를 타도, 매장하려는 것이었다. 평양 한구석에서 생긴 별치 않은 이 사건이 어느덧 전국에 알려지고 전국에서 용도를 시기하고 미워하던 사람들이 총궐기하여 용도 공격에 달라붙었다. 그래서 용도에 대한 비방, 험구, 욕설, 저주가 차마 귀로 들을 수 없는 정도의 것으로 전국을 휩쓸었다.
이에 용도 목사를 잘 알고 용도 목사를 진심으로 앙모하는 이들은 이를 갈며 통분하였다.
이렇게 평양 교계가 야단 법석을 하고 있을 때 용도 목사가 평양에 들리게 되었다. 말하자면 한준명을 평양에 소개한 이가 용도 목사이었는데, 그 한준명이 와서 이렇게 중대 문제가 생겼으니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분자들이 용도 목사를 붙들고 힐난을 하려는 것이었다. 마침 목사님이 모상회에 가 앉았는데 평양 교계의 유력자 7~8인이 달려들었다. 그들은 자기네들의 눈에 보이는 한준명을 설명한 후 결국 한준명은 나쁜 사람이요, 교회를 망치려 다니는 자라고 단언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한준명은 이 목사가 소개하여 평양에 데려다가 이 일을 일으켰으니 이 목사도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목사의 위신과 명예를 아끼는 의미에서 하는 말이오니), 한준명이 잘못이라는 것과 한준명을 소개한 것에 대한 유감의 뜻과 이제부터 한준명과는 인연을 끊는다는 것을 중외(中外)에 서명하시오."
이 말을 듣고 이 목사는 말없이 눈을 감고 한참 동안 묵도를 올리시더니 입을 열었다.
"나는 신앙태도에 다소간 다른 점이 있다는 한준명은 고사하고, 도적이나 음부나 살인강도라고 하더라도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다가 죽기를 원하고 힘쓰는 자입니다. 만일 여러분 보시기에 양해 못할 점이 있든가, 용인 못할 것이 있거든 버리든가 내쫓든가 하십시오. 나는 ㅡ 나의 원하는 바는 세상이 버린 사람, 세상에서 몰리어가는 사람을 받아 그를 거두어 손을 잡고 울며 살려고 합니다. 내쫓는 것은 당신들의 자유요, 임무일는지 모르거니와 나는 쫓기는 자를 거두어 그들과 함께 우는 것이 나의 사명이라고 믿습니다."
여러 사람의 입에서는 숨소리 하나 안들리고 오직 목사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을 뿐이다. 그의 얼굴에는 중대한 결심과 커다란 환난을 예상하고 엄숙하고 침통한 빛이 띄어 있었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딤후3:12).
한준명 사건이 무엇이기에 이리도 소란인가? 그는 누구인가?
한준명은 1907년 대구에서 태어나 간도로 이주하여 명동학교와 은진중학을 졸업했다. 1926~30년에는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그는 윤동주, 송몽규, 김정우, 문익환 등의 은사였다. 그는 학교를 공산화하려는 이들에게 반대했다가 생명의 위협을 받고 1930년 말 누이 한의정이 사역하던 원산으로 간다. 거기서 장로교회의 조사(전도사)로 일하기 시작했고, 1931년 여름 원산을 방문한 이용도와 이호빈을 만난다(간도의 이호빈과는 이미 관계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헬라어, 독일어, 일어 등에 능통하여 '어학의 천재'로 불렸다고 한다.
시간은 흘러 1932년 10월. '이용도 금족령'에 분노한 평양 형제들은 자체적인 집회를 갖고자 했고 이용도는 갈 수 없게 된 자기 대신 다른 이를 인도자로 보내는데 그가 한준명이었다.
다시 때는 1932년 10월 말~11월 초. 20대 중반의 이 젊은이의 집회는 은사주의적 열기가 뜨거웠던 것 같다. 하나님이 어느 사람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예언의 은사를 주장한 듯하다. 현재 이때의 내용을 자세히는 알 길이 없다. 정확한 집회 날짜조차 말할 수 없는 상태다. 그 내용도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비판자들의 기록에 희미하게 남아 았는 정도다.
그런데 그의 집회 한 번이 무엇이 그리 대단했기에 그 청년을 두고 오늘까지 수십 년을 악한(惡漢)으로 우려먹는가? '악한'은 '악사'를 많이 말한다는 말이 생각난다.
변종호는 '한준명 사건'의 핵심은 다른 데 있었다고 한다. 이 일이 용도를 쓰러뜨리려는 자들에게 희소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겉으로는 한준명을 물고 늘어지지만 사실 총구는 용도의 관자놀이를 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 평양에서 한준명이 무엇을 했는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걸 명확히 알 수 있는 길은 없다. 혹 안다고 해도 그게 이용도의 신앙과 이름에 무슨 큰 영향이 되는 것도 아니다. 또한 한준명이 어떤 사람인지 정당한 평가를 내리기 위해서는 적대자들의 말만 아니라 무엇보다 한준명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아야 한다.
이용도에 관한 가장 종합적이고 구체적인 증인 변종호는 한준명보다는 이 사건으로 이용도가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주목한다. 변종호에게 주인공은 이용도였다.
한준명 사건은 분명이 용도 목사의 일생에 극히 중대한 한 선을 긋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용도 목사는 모든 험구, 욕설, 공격, 박해를 말없이 받는 무저항의 구도자게 되고 말았으니 그것은 세상이 나쁘다는 사람, 세상이 죽여버리겠다는 사람을 사랑하다가 그와 운명을 같이 하겠다는 선언을 했기 때문이었다.
한준명 사건은 분명이 용도 목사의 심경에 어떤 큰 결정을 가져왔으니 위대한 일이나 찬란한 일, 나라를 구한다거나 민족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극히 작은 일, 세상에서 보기에 아주 우스운 극히 작은 한 사람, 혹은 극히 악한 사람 하나를 사랑하는 일에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고요히 죽어지리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즉 "내 사랑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서 네 모든 것을 바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서 설교도 부흥회도 그만두고 경우도 시비도 가리지 말고 그저 사랑, 무차별의 사랑에 망하고 또 죽기로 작정하였다.
"주님, 무차별의 사랑, 무조건의 사랑, 그것은 주님께도 의미가 있는 일인가요? 나라를 구하고 교회를 개혁하고 민중을 개우치는 '계획과 목표'를 뒤로하고, 세상에서 매장되는 내 앞에 서 있는 저 한 젊은이를 위해 같이 욕을 먹고 같이 주먹질을 당하고 나누어 사약을 받는 것은, 주님께 의미가 있는 일인가요?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요15:13). 우리의 친구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올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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