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대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몸가짐 > 365묵상집

본문 바로가기

회원로그인

365묵상집

적대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몸가짐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8-04-03 12:04 조회5,447회 댓글0건

본문

   이태순 씨에게

   나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하여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

   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네 이 뺨을 치는 자에게 저 뺨도 돌려 대며 네 겉옷을 빼앗는 자에게 속옷도 금하지 말라"(눅6:27-29).

   바울: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12:14).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롬12:19).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고전4:12-13).

   베드로: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2:23).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벧전3:9).

   "사람을 기쁘게 하오리까, 주님을 기쁘게 하오리까?"

   "사람에게 버림을 당할 때 하나님에게는 사랑을 받고 사람에게 칭찬을 받을 때 하나님에게는 멸시를 당하느니라."


   순수한 사랑은 어떤 것입니까?

   "사랑은 순수함을 요한다. 그 가운데 조금일지라도 불순한 것을 포함해서는 아니 된다. 순수한 사랑은 그 속에 투기가 없다. 자랑이나 교만도 그 속에는 있을 수 없다. 순수한 사랑의 소유자는 무례히 행치 아니한다. 자기의 이익을 구치 아니하며 어떤 일에든지 성내지 아니하며 사람의 불선한 것을 기억치 아니하고 의 아닌 것으로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를 기뻐하고 또 범사에 참으며 믿으며 범사에 주의 뜻을 바라느니라."


   선인과 악인을 어떻게 구별합니까?

   "즐겨 사람의 악을 말하는 자는 악인이다. 즐겨 사람의 선을 말하는 자는 선인이다. 즐겨 사람의 악한 일을 듣는 자는 악인이다. 즐겨 사람의 선한 일을 듣는 자는 선인이다. 선인은 사람의 악사를 말하되 비통을 느끼지 아니치 못하고 악인은 사람의 선사를 듣되 불쾌를 품지 아니치 못하느니라. 사람의 악사를 들을 때 우리는 먼저 그것을 말하는 자의 악을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선은 여성적이요, 악은 남성적이다. 선은 약하되 강하고 악은 강하되 약하며 선은 져서 이기고 악은 이겨서 지는 것이니라. 우리는 이겨서 질 자가 아니요, 져서 마침내 승리를 얻을 자니라."


   선(善)의 존경

   어떤 사람에게 1의 선과 99의 악이 있느냐. 그러면 나는 한 개의 선을 위하여 저를 사랑하고 존경하겠노라. 세상에 한 사람의 선인과 99명의 악인이 있느냐. 그러면 나는 한 사람의 선인을 위하여 세상을 귀히 알고 중히 여길지니라. 나는 나의 모든 선한 것을 그를 위하여 제공하고 세상의 개선과 구제를 위하여 빌지라. 나는 사람과 세상에 많은 악을 찾아 불평으로 삼지 않고 그 작은 선을 찾아 사랑과 존경으로 살려 하노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매 우리는 사랑함으로써 비로소 하나님을 알지니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저를 신앙하기 불가능하니라.

   사랑으로 시작되지 않는 신앙은 허위의 신앙이니 이는 사람을 죽일 신앙이니라. 세상에, 신앙에 사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쟁투가 많은 것은 사랑에 근거를 두지 않은 신앙, 곧 무애(無愛) 신앙의 소유자가 많은 까닭이니라.

   사랑은 곧 생명이라. 사랑 없는 신앙은 생명 없는 신앙이니라. 교리와 신조의 송독(誦讀), 교회 출입의 형식, 이런 신앙의 형식(껍질)으로 신앙의 전부를 삼아 스스로 속는 자, 그 얼마나 많은 현대인고!

   네가 신앙의 소유자냐, 그러면 너는 사랑의 소유자가 될지어다. 사랑이 없는 신앙은 불 꺼진 등이요, 맹인의 안경이니라. 더욱더 주님의 사랑을 아는 가운데서 자라가라.

 

1932년 7월 12일

유향산인(乳香山人)

 

 

   이용도는 왜 다시 이런 편지ㅡ무고한 욕과 비방을 입에 달고 있는 이들이 그를 괴롭히고 있음을 떠올리게 하는 편지ㅡ를 쓴 걸까? 그런 이들이 주변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자꾸 들려오기 때문이다.

   이용도는, "나를 대적하는 자들을 향하여 내가 어떻게 하오리까?"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답한 뒤 그것에 완전하게 순종한다. 성서학자들이나 어설픈 식자들의 쉬운 두뇌순종보다 높은, 심신의 순종이었다.

   이어 선인과 악인의 구별법을 이야기한다. 이는 아주 간단한데, 선한 일을 즐겨 들으면 선인이요 악한 일을 즐겨 들으면 악인이다. 남에 대해 선한 말을 즐겨 하면 선인이요, 남에 대해 악한 말을 즐겨 하면 악인이다.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산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이용도와 쫒기는 무리들의 상황에 이것을 적용해보면, 비난자들은 이용도와 무리들이 울며 더 기도하고 기뻐 더 전도하는 등 이렇게 변화된 신앙을 불쾌하게 보며 꼬투리를 찾는다. 이용도와 무리들은 그럼에도 비난자들을 같이 비난하지 않고 도리어 복을 빌고자 하니, 하늘의 기준으로 누가 악인이고 누가 선인인지는 벌써 드러났다.

   이용도는 계속 말하기를, "선은 여성적이요, 약하되 강하고, 져서 이긴다"고 하니, 이용도와 욕먹는 무리들은 교권자들에 비하면ㅡ일제 앞에 선 가냘픈 조선 여인처럼ㅡ힘은 비교가 되지 않으나 최후 승리는 오히려 약한 우리 쪽에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굳게 세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랑의 길로 가는 사람에게만 승리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편지에서 '사랑 없는 신앙이 결국 사람을 죽인다'고 하는 것은 현재 그가 처한 환경 속에서 깨닫고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사랑은 곧 생명이라", '신앙의 소유자는 사랑의 소유자가 되라'는 말을 덧붙인다.

   은혜롭고 큰 역사가 일어나는 부흥회를 가장 순수하고 헌신적으로 사리사욕없이 인도했음에도 의혹을 사며 말질과 배척이 날아오는 것은 비판자들의 믿음에 사랑이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일도 사랑으로 보면 선하게 보이고 혹 실수가 있어도 사랑으로 교정해줄 것인데, 사랑이 없으면 좋은 것도 나쁘게 보이고 아니면 좋은 것도 나쁘게 봄으로써 어떻게든 흠을 찾는데 힘을 쓰게 된다.

   신앙이 사랑에 빠짐이 아니라, 신앙에 사랑이 빠지는 순간 그것은 몽둥이요 칼로 변한다. 신앙에 사랑이 있으면 누구를 그렇게 쉽게 오해하지도, 그렇게 빨리 정죄하지도, 그렇게 크게 부풀리지도 않을 것이다. 이용도가 추락하는 근본 원인 중 하나는 당시의 교권자들이 사랑과 긍휼과 자비에 철저히 실패한 무애신앙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마12:7)는 말씀이 다시 땅을 울렸다.

   사랑이 없는 신앙의 가장 큰 손해는 아마 이것일 것이다. 사랑이 없는 신앙을 가진 이는 사랑이신 하나님을 알고 즐거이 누리지 못하게 됨으로 그는 '두뇌적 애착'과는 달리 심령적으로는 하나님을 점점 잊게 되고 잃게 된다. 그러나 지식이 조금 모자란다 할지라도 그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사랑을 가졌다면 그 사랑을 통해 믿음과 지식이 점점 자라나고 그러는 동안 하나님을 알고 즐거이 누리게 되어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다(비교, 고전8:3).

   사랑 없는 신앙이 사랑 있는 신앙을 죽이면 세상과 교회는 사랑 없는 신앙이 차지하게 되는 것 같을 지도 모른다. 일견 그럴 것이다. 일시 그럴 것이다. 하지만 하늘에서는 사랑 없는 신앙이 시작부터 실패했고 오직 사랑 있는 신앙이 승리하였으니, 사랑 있는 신앙은 약한 것 같지만 강하고 지는 것 같지만 이기는 것이 그 속성이요 그 초극적 운명이기 때문이다.

   이용도가 삶으로 고통스럽게 배운 것을 우리는 쉽게 잊어버려서는 아니 된다. 그 배움은 무엇이었는가? 신앙은 사랑으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가 추락하면서, 아니 추락을 받으면서 배웠던 이것은 매우 비싼 대가를 치르고 후대에 남겨준 고귀한 교훈이다.

   오늘날 학술 논문 속의 '기괴한 이용도'가 아닌, 이용도 자신의 글을 통해 이용도의 참 모습을 보고 이용도를 보내주셨던 하나님을 찬송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의인의 피의 호소와 양심의 진실 호소가 하는 재촉에 역사도 마음이 급해진 건가.

   누가 정말 승리자인가? 그때 강하여 승리한 줄 알았지만 지금은 아무 감동도 주지 못하고 납득도 되지 않는 그들인가? 그때 그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야 영양가도 없구나. 그들은 자기네 이름이 알려지는 것이 차라리 창피할 것이다. 하지만 이용도와 약한 무리들은 시간의 정화를 통해 그 어마어마한 욕과 곡해의 때가 벗겨나감으로써 갈수록 더 많은 이들의 존경과 칭송을 받으니, 하나님의 오묘하신 지혜는 하나님의 의와 자비를 거슬러 되지 않는 말들로 떠들어댔던 비방자들의 인간적 열심과 책략 위에서 일하시었던 것이다.

 

   의와 진리와 사랑 향해

   주먹 쥐고 덤비지 마라

   잠깐 이기는 듯해도 영원히 질지니

   어찌 마귀의 길동무 되려느냐

   지지만 사랑을 택함으로 결국 이기는 자이냐

   이기려다 남을 죽임으로 결국 지고 망할 자이냐

  

"주님의 긍휼과 선하심을 닮은 길을 택함으로써 자비의 주님께 감히 덤벼다는 일 없게 교훈하소서. 아멘."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우)121-812 서울시 마포구 도화동 2-43 / TEL : 02-716-0202 FAX : 02-712-3694
Copyright © leeyongdo.com All rights reserved. 상단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