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1년 12월 평양 명촌교회 부흥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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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11-27 00:33 조회5,450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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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호는 명촌교회로부터 10리 되는 거리에 숙소를 두고 눈 속으로 발이 푹푹 꺼지는 길을 새벽 3시면 일어나 걷고 밤 11시가 넘어 돌아오기도 했다. 그때 그가 본 부흥사 이용도의 강단 뒤의 내막이다.
세찬 바람이 불어치는 눈길에서 다리가 얼어서 옮겨 놓을 수가 없고 숨이 차서 숨을 쉴 수가 없어 돌아서서 쉬곤 했다. 이때의 부흥회에서 목사님은 인간의 힘으로 하기 어려운 일들을 많이 하였다. 어느 날 밤에는 시계가 7시 반을 가리키고 있을 때 시작한 목사님의 기도가 10시에 끝나기도 했다. 한 번 엎드려 그 빠른 말씨로 2시간 반이나 기도를 드린 셈이었다. 집회는 보통 3~4시간이 걸렸다. 집회가 끝나면 겹겹이 남아있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기도를 해 주신다. 이 안수기도가 거의 1시간이나 걸렸다. 그것이 끝나면 겨우 침실로 돌아오신다.
예배당을 나와 숙소인 전도실에 들어설 때면 겨울 셔츠가 땀에 푹 젖고 솜저고리가 땀에서 건져낸 것같이 젖어 있었다. 심지어 겉의 조끼와 주의(周衣)까지도 땀에 흥건했다. 그때의 모습을 어떻게 짧은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러나 만일 그 광경을 직접 목격한다면 누구도 얼굴을 바로 들고 보지 못할 것이었다. 모두 고개를 뒤로 돌리고 혀를 끌끌 찰 것이다. 아마 한 번이라도 명촌교회 앞방 전도실인 숙소에 들어서는 목사님의 모습을 본다면 나의 이야기가 조금도 과장이 아님을 알 것이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이렇게 땀을 많이 흘렸다. 하물며 삼복더위에는 어떠했으랴.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땀을 흘리고 1시가 넘어서 나오시면 침실에는 소위 사모한다는 사람들과 따르는 사람들이 10명이나 20명, 많을 때는 30~40명까지 진을 치고 앉아있었다. 말이 앉아있다고 하지 사실은 그 좁은 방에 한데 뭉쳐있다고 하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목사님께 가까이 있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요, 단 한마디라도 목사님과 얘기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기다리던 이들은 목사님이 나오시기를 기다렸다가 나오시기만 하면 겹겹이 에워싸고 이리 밀고 저리 미는 통에 방안은 사람의 김에 숨이 콱콱막힐 지경이 되고 만다.
여기에다 이 사람, 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한마디씩 하는 동안 별 얘기가 다 나온다. 이런 속에서 어떻게 목사님이 주무실 수 있었겠는가. 무엇보다 빈틈없이 들어찬 사람들은 목사님께서 누우실 단 한 치의 자리도 내어주지를 않는다.
이렇게 또 2~3시간을 시달리다 보면 벌써 새벽 4시가 넘는다. 그러면 또 새벽기도회에 나갈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때 새벽기도회 시간이 5시였는지 5시 반부터였는지 분명히 기억할 수는 없지만 목사님은 항상 정각 전에 나가서 엎드리셨다. 말하자면 그에게는 새벽 3시나 4시라는 시간 관념은 안중에도 없는 것이었다. 시간만 허락하면, 언제나 집회가 시작되기 1시간이나 2시간 전에 나가 준비기도를 하고서야 단에 서셨다.
한마디로 그의 집회 인도의 생활은 불면(不眠), 불휴(不休), 불식(不食)이었다. 그래서 그저 엎드려 기도, 단에 올라 설교, 그러다가는 찬송, 땀, 눈물, 오직 이것뿐이었다.
이렇게 밖으로 돌아다니시며 땀과 눈물을 쏟으시는 한편 목사님 댁은 마치 과부의 살림살이처럼 항상 궁색하고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곳에서 집회를 하면 떠날 때 넉넉히 여비를 주는 데도 있었다. 그러나 언제고 자기 집 대문에 들어서기 전에 없어져 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그래서 늘 집안은 구차하기만 했다. 도대체 어떻게 해서 생기는 돈을 다 써 버리는가.
이 목사님은 워낙 사랑 많고 불쌍한 사람에게 동정 잘하기로 유명하였다. 그래서 어느 곳이나 이 목사님이 나타나기만 하면 그곳에 사는 딱한 사람, 울던 사람은 모두 찾아와 사정을 하고 동정을 구하며 구걸하였다. 이런 사정을 들을 때 손에 돈이 없으면 위로해주고 기도만 해주지만 후에 돈이 몇 푼이라도 생기면 그때는 전날에 기억해두었던 그 사람을 불러서 얼마씩이라도 있는 대로 다 나눠 주신다. 이래서 목사님의 손은 언제나 비어 있는 것이다.
이 명촌교회에 내가 오니 목사님 댁의 형편을 자세히 묻는다. 나는 내가 아는 데까지 대답해주었다. 그랬더니 그 교회에서는 목사님이 모르게 30원을 경성 댁으로 보내주었다. 목사님께는 아무리 드린대도 집에까지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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