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이 러브콜을 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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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6-13 23:29 조회5,47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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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2월 26일 수요일, 이용도는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에 첫발을 내렸으니 평양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열게 된 것이다.
이덕주 교수는 "평양 감리교 선교와 남산현교회 역사"라는 논문에서 1895년과 1906년의 평양을 두 가지 인용으로써 그 명암을 생생하게 대비시켰다.
먼저 여행 작가로 유명했던 이사벨라 비숍(I. Bishoop, 1831~1904)은 1895년 처음 평양을 방문하면서 이렇게 썼다.
평양은 대단히 풍요로우면서 동시에 대단히 타락한 성읍이었다. 평양 사람들은 많은 선교사들을 내쫓았고 반감을 갖고 기독교를 심하게 배척했다. 기독교에 대한 적개심이 팽배했고 관에서 관리하는 매춘부, 기생들이 넘쳐났으며 무당과 점쟁이들이 악명과 부를 동시에 축적하고 있었다.
다음으로 1906년 감리회(북) 평양 거주 선교사 노보을이 연회에 보고한 내용은.
교인들은 평양 시내 지도를 놓고 집집마다 교인 여부를 파악한 결과 전체 가구 중 40%가 교인집이거나 가족 중 한 명이라도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결과는 불과 10년 전과 비교했을 때 참으로 놀라운 변화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때는 세 집 중 두 집이 술집이었고 평양은 조선에서 가장 사악한 도성이라는 오명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 많던 술집들이 문을 닫거나 사라졌는데 이유는 더 이상 술장사가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10년 사이 평양이 놀랍게 바뀐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평양대부흥이 촉발되는 이듬해 1907년에는 평양 제1의 감리교회인 남산현교회의 교인 총계는 세례 입교인 243명, 학습인 570명, 원입인(구도자) 1,487명, 주일학교 학생 1,138명으로 총 3,438명이었다.
평양성 '안'의 교인 증가는 성 안 교회개척으로 이어져, 1906년에는 두 번째로 이간동교회가 설립되었다(선교사들은 드류 · 아펜젤러 기념교회 Drew Appenzeller Memorial Church라고 불렀다). 교회는 꾸준히 발전하여 1911년에는 성인과 학생이 약 500명이 되었고, 새 예배당도 건축했다. 이후 평양중앙교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이용도가 방문하는 1930년 2월 현재, 남산현교회에 다음가는 교세를 자랑하고 있다.
이용도는 이 교회로부터 여러 차례 '러브콜'을 받았었다. 일기를 통해 확인되는 것만도,
1929년 10월 21일 : 평양중앙교회ㅡ윤자겸, 조창일, 이은용.
1929년 11월 8일 : 평양으로 오라고, 중앙교회의 CKC에게서.
1930년 1월 11일 : 1월 4일 평양서 온 간절한 편지를 다시 보다. 중앙교회 제직이 연서(連署)하여 간청하였다. 감당치 못할 일이다.(18인 연서)
1930년 4월 3일 : 평양 중앙교회에서는 오라는 청이 여러 번 왔다 … 오후에 또 편지가 왔다. 연봉 1,200원을 작정하고 온 교우가 다 오기를 청한다.
1930년 4월 10일 : 평양 중앙교회에서 오라는 편지가 또 왔다.
중앙교회는 이용도를 열렬히 원하였다. 당시 새파란 서른 살 이용도는 강원도 산골 통천구역을 맡고 있었는데, '기독교 세계의 중심' 평양에서 오시라 오시라 애걸복걸을 한다. 평양에서 월 100원을 받는다고 하면, "그때 이 목사는 십 원 받을 때였는데 10배나 더 주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중앙교회에서 몇 년만 잘 버티면 그 다음은 북한에서, 아니 당시 대한에서 가장 큰 교회 중 하나인 남산현교회를 맡게 될지도 모른다. 병원비 못 내어 끙끙 앓지 않아도 되고 두메산골 자전거로 오르락내리락 수십 리 오가지 않아도 된다. 것도, 내 가겠다는 것 아니라 저쪽에서 오라 야단이니 못 이기는 척 자기를 내맡기면 되잖은가?
평양 중앙교회에서는 오라는 청이 여러 번 왔다. 오랫동안 생각한 후 단념하고 갈 수 앖다는 편지를 보냈다. 오후에 또 편지가 왔다. 연봉 1,200원을 작정하고 온 교우가 다 오기를 청한다. 아, 나는 어찌할꼬. 이는 나에게 유혹인가, 나에게 내리는 은혜인가. 물질과 명예와 영광이 내 앞을 가리우지 말게 하옵소서.
평양중앙교회 부임은 화려한 시작이요 대단한 명예의 길임은 세상과 이용도 자신이 모르는 바 아니었다. 그게 문제였던가?
평양중앙교회에서 오라는 편지가 또 왔다. / 오 심조(心鳥)야, / 명예를 위하여 말고 주님을 위하여 할지어다. / 심조야, 교만하지 말아라.
이용도의 절친인 동지 이호빈 목사에 의하면, 이용도가 평양중앙교회의 파격적 애절한 구애를 물리친 이유는.
돈 때문에 범죄한다는 이유였다.
송길섭 교수는 이에 대해, "이때 그의 나이 갓 30세였다. 용감하다는 말이 여기에서는 더 실감이 난다. 그가 만일 물질이나 명예에 대한 야심이 있었다면 군소리 없이 또 고민도 없이 평양으로 곧 갔을 것이다"라고 한다. 그러면서 이용도의 '목회자론'에 대해 설명하기를,
이용도는 목사직을 월급쟁이로 생각하는 것을 본능적으로 혐오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오히려 그는 목사직을 가장 높은 지위인 하나님의 사신 또는 하나님 나라의 대사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성직이 어떤 사람의 일신의 영달이나 생활의 도구로 이용될 때 그의 무자비하고 날카로운 공격이 무차별적으로 가하여졌던 것이다. 이런 그의 경고는 오늘의 교회에도 해당된다고 본다. 목회의 성공을 교인 수와 목사의 월급 액수로 평가하려는 오늘의 교회 풍토는 이용도의 날카로운 비판의 첫째 목표가 될 것이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따져보아 더 좋은 조건을 고르는 것이 목회자의 인지상정이 된 오늘날, "이용도가 평양행을 자꾸 거절한 것은 인간적 고집이요 하나님이 열어주신 문을 차버리는 교만이었어"랄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각자 제 믿음대로 될지어다. 목사의 직분을 "월급쟁이"로 보고 "일신의 영달이나 생활의 도구로 이용"할 목회자는 그렇게 하시고, 이용도를 닮고 따를 목회자는 이용도를 닮고 따르시면 그만이니, 서로 싸울 것도 없다. 단, 각각 그 목회의 질과 수준과 내용과 영향과 결과와 훗날 심판대에서의 평가와 책임은 자기가 당한다는 점은 기억하자.
"주님이시여, 광고공해의 오늘날, 어색하게 긴 명패를 모가지에 걸고 자기를 주님의 종이라 광고하는 이들 중 몇 십억 몇 백억으로 공사를 했느니 성도들이 몇 천 몇 만이라느니 헌금을 얼마나 작정해야 좋은 장로, 권사, 집사라느니 하는 별별 별소리들이 주님 나라에 똥칠을 해쌌는 역모를 꾀하고 있습니다. 이 늑대들의 입맛으로 인하여 주님의 나라는 피가 흐르고 주님의 이름은 먹혀 사라지며 주님의 능력은 저 멀리 물 건너가니, 주님이시여 언제까지 참으시려 하나이까? 세상의 눈에 바보 같고 어리석고 못난, 그 진정으로 위대한 목자들을 어서 한국교회에 더욱 보내시사, 우리 양떼들을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께로만 인도하게 하옵소서. 부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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