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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묵상집

학생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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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5-10 23:51 조회5,71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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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도!

   나는 한 학도로다. 그러므로 그저 배우기에만 열중하리라. 이는 모든 것이 다 나를 가르치며 훈계함이 되겠으매. 모든 사람, 모든 사물, 이는 다 여호와의 거룩한 음성이었느니라. 나는 영원히 지극히 작고, 지극히 미련하고, 지극히 작은 한 학도일 뿐이로다. 나는 이때까지 보유하려고 애쓰던 나의 선생 지대(地帶)를 떠나노라. 그리고 영원히 학생의 급(級)으로 내려 가노라.

   종래는 선생의 마음을 가졌던 고로 나의 배우고 깨닫는 것이 극히 적었도다. 동시에 나는 교만에 빠졌었노라. 이는 큰 마귀였도다. 나는 이제 깨달았노라. 저 어린애, 걸인, 천녀(賤女), 곤충, 금수, 초목, 이는 다 나의 선생임을 깨달았노라. 귀인과 지인은 물론이고.

   나는 이제부터 교만한 선생이 아니로다. 다만 겸비한 학생이로다. 이제부터 배우는 마음으로 모든 것에 대하여 무릎을 꿇리라. 그리고 절하고 배우리라. 내가 저희를 가르칠 것이 아니라, 저희가 나를 가르치는 선생이로다.

   선악이 개오사(皆悟師)라. 무식한 사람, 약한 사람, 선하고 귀한 사람, 다 나에게는 없어서 안될 선생이로다. 내가 선인, 지인에게 배움보다 악인에게서 배움이 더 많았느니라.

   심조(心鳥)야, 배우라. 열심으로, 겸비한 마음으로 배우라. 가르치려던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이제부터 겸비하게 무릎을 꿇고 배우라.

 

   지혜 있는 자는 배우기에 열중하고 미련한 자는 가르치기에 급급하느니라.

 

1929년 12월 19일 (목)

     

 

   1.

   이용도는 어디로 보나 선생이었다. 그 옛날, 대학을 나오고 영어 백과사전을 사랑했고, 일본어로 된 책도 읽고, 학창시절부터 잡지사에 원고를 보내주었다. 조선 각 교파들이 함께 쓸 성경 공과의 6개월 치를 영한 번역하기도 했다. 동양은 물론이요 서양의 문사들까지 섭렵하여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다. 그는 선생이 되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깨달았다. 가장 큰 배움을 얻는 길은 겸손임을, 배우려는 자세임을, 아이와 거지와 들판의 풀과 숲의 나무 앞에서까지 무릎을 꿇는 것임을.

   그가 배우려는 이유는 더 알아 잘난척하거나 논쟁에서 싸워 이기기 위함이 아니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였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롬1:20). ㅡ 그는 모든 피조물에서 창조주의 지문을 찾고자 했다.

   하나님의 오묘하심은 신비 속에 있으나, 겸손한 자는 깊은 우물물을 길어 올린다. 듣고자 하는 겸손과 유심히 보는 관찰력으로 살아갈 때, 인생은 신비와 발견의 오붓한 대화가 된다.

   작은 스승은 자기가 스승이라 생각하는 스승이요, 큰 스승은 자기가 학생이라 생각하는 스승이다.

 

 

   2.

   인간은 같은 대상을 두고도 각기 다르게 평가하니, 이는 사람마다 인식 즉 '받아들임의 창문'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물은 '나의 눈'을 통과하여 내 안에 새겨지는데, 나의 눈을 통과할 때 한 차례의 굴절이 일어난다. 사람마다 눈이 다르기에 굴절의 방향과 정도와 색이 각기 다양하다.

   어떤 사람과 대화할 때 그와는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거나 나의 말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상대방의 인식 즉 받아들임의 창문에서 일어나는 굴절이 제법 큰 것이 한 이유일 수 있다.

   즉, 나의 본의와는 달리 상대는 그가 가진 기대와 생각의 창으로 바라보니, 나의 뜻은 다소 다르게 인식되거나 혹은 엉뚱하게 인식되기도 한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답답함이나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고 간혹 나의 시각으로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되는 이득이 있거나 혹은 불필요하게 서로의 에너지가 낭비될 수도 있다.

   노인층이나 식자층처럼 경험과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나 전문가들에게서 이런 경향이 ㅡ 아닐 것 같으면서도 오히려 ㅡ 나타나기도 한다. 많이(?) 알기에 혹은 겪었기에, 상대방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결론을 내려주는 속도가 '벌써'만큼 빠르다. 그래서 그들의 특징이 '들을 줄 모른다'는 것이 된다. 그럼 가까이 하기가 어려워지고 오해가 생기고 불신이 싹튼다. 지식과 경험은 우월할지 몰라도 '듣는 귀'가 없다는 것이 수많은 장점들을 퇴색시킨다.

   그런데 사물을 객관적으로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가능한가? 주관적 존재인 인간에게 객관적 인식이 가능한가? 서구에서는 이런 질문과 노력이 그리 성공하지 못했으나, 이용도는 이보다 더 위대한 시각을 가지고 사물 인식에 접근한다. 패러다임 혁명! ㅡ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거기서 하나님의 진리 조각을 찾아보자는 시각! 가장 높고 가장 깊은 눈이었다.

   이런 시각에 의하면, 세상이 가장 하찮게 여기는 것들로부터도 가장 값비싼 진리를 배울 수 있고 세상이 가장 부정하게 여기는 사람으로부터도 가장 순결한 진리를 얻을 수 있게 된다.

   누구는 자기의 편견과 선입견 때문에 사물을 그르게 인식하고, 누구는 자기의 분노와 질투 때문에 상대의 선한 점도 약한 점으로 보며, 또 누구는 자기의 굳어진 지식과 경험 때문에 상대가 말하기도 전에 결론을 짓고, 혹은 나름 상대의 말을 그대로 들어보려 노력하는 수준인 반면에, 이용도는 상대가 하찮아도 배우고 위대해도 배우며 의인이어도 배우고 악인이어도 배움을 얻는다. 하나님의 음성이나 마음이나 말씀이 있는지만이 그의 관심이었다. 이러한 인식의 차이는 가히 사람됨의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냈고, 나아가 인생의 질적 차이를 이루어주었다.

   나는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가? 선(先)지식과 선(先)경험에 의한 '평범한 눈'을 가졌는가? 일단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나쁜 눈'을 가졌는가? 주관적 존재로서 객관을 내세우다가 실패하고 있는가? 아니면 이용도처럼 하찮은 것에서도 진리를 찾는 겸손하고 선(善)한 눈을 가졌는가?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마 6:23).

 

 

"주님, 이용도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가 듣고자 모든 피조물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이런 겸손한 자세는 관찰력을 길러주었고, 그가 발견한 하나님의 지문과 자취와 메아리는 산 예화로 승화되어 그의 설교를 빛나게 했을 것입니다. 배우려는 자세로 인하여 사람들과 더욱 화목하게 되었을 것도 물론입니다. / 비굴함이 겸손이 아니요 당당함이 교만이 아니라, 겸손은 듣고 배우려는 마음이요 교만은 듣지 않고 말만하는 태도입니다. 교만하기에 쾌적한 해발고도에서 내려와 아이 앞에 절하는 겸비한 신앙을 우리가 배우게 하셔서, 우리 민족의 장래에 하나하나의 작은 촛불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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