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에서 떠오른 부흥의 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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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4-22 23:16 조회4,9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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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 당시는 한 해의 사역을 의논하고 세우는 지방회(the district conference)가 열리기 전에 목사와 전도부인들이 모여 기도회를 갖고 부흥회를 한 다음 마지막으로 지방회를 보았다. 원산지방회가 열리기 전 3일간 기도회와 5일간 부흥회를 먼저 하게 되었다.
1928년 11월 5일 월요일, 금강산 온정리에서 남감리회 원산지방의 지도자 15명이 부라만 선교사의 인도로 기도회를 가졌다. 통천구역의 용도는 교회 청년 김창희를 대동하고 참석했다. 3일의 기도회가 끝난 뒤 원산지방 내 직분자들을 위한 5일간의 부흥회가 시작되었다. 선교 20년차, 춘천지방에서 온 부라만 선교사가 직분자 부흥회도 인도했다.
부흥회가 열리고 있는 토요일에는 용도의 교회에서 유치원 교사 김채경, 그리고 고 씨와 청년회장 유원복이 도착했다. 용도와 함께 월요일부터 참석한 김창희와 이들 셋은 현재 두 파로 분열된 교회 내에서 같은 편이었다. 그러나 갈등의 상대편인 주일학교 측에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두 그룹을 화해시키고자 했던 용도는 안타까웠다. 거기다 이들은 부흥회보다는 금강산 관람에 기대를 두는 것 같았다.
토요 부흥회가 끝나고 주일이 되었다. 김채경 자매가 용도에게 와서 아침예배에 가지 않고 산에 가겠다고 했다. 은혜를 통해 반목이 치유되기를 원했던 용도의 속은 타들어갔다. 그는 채경에게 산에 가지 말고 교회에 가는 것이 좋겠으니 기도해보라고 했다.
용도는 주님께서 채경만 아니라 통천교회의 다른 젊은이들도 산이 아니라 교회에 올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면서 교회로 걸음을 옮겼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서니 감사하게도 채경과 다른 세사람이 모두 앉아 있었다.
예배 중에는 은혜가 있었다. 그러나 부흥회 마지막 날인 월요일에는 채경 자매나 원복, 고 씨 등은 직장일로 통천으로 돌아가야 했다.
월요일 아침이 되었다. 주일학교 쪽에서는 아직도 오지 않았다. 용도는 그래도 한 쪽이라도 진실로 회개한다면 교회의 치유에 보탬이 될 것이라 자기를 달래보았다. 채경이 다시 용도를 찾아와서,
"저는 아침식사를 마치고 돌아가겠습니다."
용도는 아쉬웠다.
'청년 직분자들의 마음이 주의 은혜로 더 녹아져야 하는데…….'
"가능하면 가지 말고 여기서 더 큰 은혜를 받도록 하지요."
주의 은혜는 가장 사모할만한 것이다. 비록 통천교회가 내분으로 쪼개져 서로서로 노려보고 있지마는 그렇다고 신령한 은혜의 귀중함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채경도 모르지 않았다. 주의 은혜를 체험할 때 눈물과 회개가 나오고 마음이 시원해진다는 것을 말이다. 그러나 채경은 해야 할 일들을 내세우며 둘러댔다.
"제가 안 가면 유치원에 선생님이 한 사람 밖에 없는 걸요? 새 난로가 와서 그 선생님은 잘 모를 거에요. 오늘은 어머니회도 있는 날이고요. 그리고……"
용도는 채경의 마음을 꿰뚫어본 것인지 주께서 하시리라는 담대함인지 확신에 차서,
"모든 일은 하나님과 나에게 맡겨두시오. 자매가 새로워지는 은혜는 자매를 위한 일이오. 그리고 나서 돌아가 아이들의 참된 선생이 되어 주시오."
채경은 여전히 주춤주춤.
조금 뒤에는 끄덕끄덕.
"그럼 그렇게 하겠어요. 은혜를 받고 난 뒤에 가도록 하지요."
용도는 기뻐하며 이 소식을 다른 통천 청년들에게 전하러 갔다.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청년회장 유원복이었다. 그는 면사무소에서 일했다. 그도 남으면 좋겠지만 도저히 빠지기가 곤란한 직장이었다. 그래서 용도는 그를 붙잡지는 못하였다.
"여기 있으면 아니 되지 않소. 돌아가도록 하고 가면서 기도하시오. 여기서 받을 은혜만큼 가면서도 은혜를 받을 수 있소."
그런데 이날 원복은 완고하던 전의 모습과는 좀 다르게 보였다. 큰 은혜를 갈망하는 얼굴이었다. 이윽고 원복은 눈물을 흘렸다. 용도는 좀 놀랐다.
'원복이 이토록 은혜를 사모하였던가.'
직장 때문에 부흥회에 늦게 온 이가 이제 부흥회 때문에 직장에 가지 않으려고 하는 모습에 용도도 같이 울 수밖에 없었다.
이때 김창희 청년이 지나갔다. 그도,
"저는 여기서 은혜를 더 받아야겠습니다. 오늘 가지 않으렵니다."
용도의 가슴에 '이때다'는 신호가 왔는지, 용도는 이들의 팔을 붙잡고 산으로 올라갔다. 살을 에는 강원도의 추위는 문제가 아니었다. 함께 기도를 시작했다. 자기의 사랑 없음과 편 나누던 것을 고통스레 뉘우치며 기도했다. 용도는 그래도 원복이 걱정되어 말했다.
"이제는 됐소. 어서 면청으로 가시오. 직장을 잃으면 어쩌려고."
그 좋은 직장도 지금은 원복에게 문제가 아닌가.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은혜에 몹시 애타게 된 지금 그에게 중요한 것은 은혜를 받는 것 오로지 그뿐이었다. 원복은 법원에서 일하는 고 씨를 위해서도 기도하자고 했다.
산에서 내려와 숙소로 가니 고 씨는 아침식사 중이었다. 용도는 다가가서, "원복과 창희 형제는 오늘 가지 않고 머무르기로 했는데, 같이 머무르시지요" 했다. 그러자 고 씨는 숟가락을 급히 내려놓고는 몸을 부들거리며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
"나도 남아야 합니다."
고 씨의 말에 용도는 주께서 지금 일하고 계시다는 확신이 들었다.
"식사를 마치면 다들 교회로 오시오.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겁니다."
이렇게 하여 월요일 아침 집회로 여러 청년들의 눈물과 사모함이 한 방울 한 방울 모여들었다.
월요일에 있었던 네 번의 예배에 네 사람은 모두 참석했고 기대했던 대로 확실한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화요일은 부흥회 마지막 날이었다. 이들은 화요일에도 남았다. 이날 밤부터는 이틀간 지방회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 마지막 날,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졌다. 주일학교 김석호 부장이 온 것이다. 드디어 갈등의 당사자들이 한데 모였다. 용도는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던가.
저녁 예배 후에는 친목회가 열려서 자정쯤에 끝이 났다. 용도는 기도하기 원하던 유원복과 함께 산으로 올라가 기도했다. 원복은 그가 미뭐했던 이들을 위해 힘껏 기도했다. 새벽 2시경 내려와 각자의 숙소로 헤어지는데 원복은 더 기도하기를 원했다. 용도는, "부흥회는 끝났지만 아침에 친구들을 데리고 교회로 오시오. 기도합시다."
그리고 용도는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자 자고 있던 석호가 깨면서 물었다.
"지금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친목회가 끝나고 원복 형제와 산에서 기도했는데 은혜가 컸소이다. 있다 새벽에 다시 기도하기로 했소. 그때 석호 군도 교회로 오면 좋겠는데."
석호는 의외로 흔쾌히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용도는 누울 수가 없었다. 주님께서 주무시지 않고 일하시는데 누울 수가 없었다. 다시 교회로 갔다. 기도소리가 들렸다. 휘장 맞은 편 여성 칸에서 나오는 소리. 전도부인이었다. 둘은 떨어진 자리에서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했다. 이때 누가 예배당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분열의 주동자인 석호였다. 석호는 용도가 숙소에 왔다간 뒤 그를 따라 예배당에 온 것이다.
은혜를 받았던 걸까? 석호는 가슴을 치며 통곡하고 바닥을 두드리며 눈물을 쏟았다. 용도가 그에게 다가오니 그는 자기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했다. 그의 울부짖음이 얼마나 처절하고 커다랬는지 근처 숙소에서 자던 사람들이 깨어날 정도였다. 얼마 뒤 누군가가 또 예배당으로 들어왔다.
바로 그때, 마음의 앙금을 남김없이 불살라버리는 성령의 불길이 떨어졌다. 기도소리는 더욱 커지고 사람들은 교회당으로 더욱 몰려오니 기도소리는 다시 커졌다. 교회가 가득 찰 때까지 더욱 더욱…….
용도는 기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숙소에 남아있던 이들을 모조리 부르려고 뛰어나갔다. 가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ㅡ 1919년 3월 개성거리를 진동시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던 그 포효로, 어쩌면 그보다 더 큰 포효로.
"성령강림만세! 성령강림만세! 빨리 오시오! 빨리 오시오!"
순간, 부라만 선교사는 다른 숙소에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 추운 11월 맨발로 뛰어갔다.
"빨리 오세요. 일이 벌어졌습니다. 와서 집회를 인도하세요."
교회로 돌아가는데 또 한 목사님이 생각났다. 그도 부르려고 뛰는데 잠시 마음이 술렁였다.
'내가 이렇게 요란 피우는 게 좀 주제넘은 일은 아닐까? 이런 일은 이곳 목사님이나 지방 장로사님께서 하시라고 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러나 그런 것을 생각하기에 용도의 가슴은 너무 빨리 뛰고 있었고 너무 뜨겁게 끓고 있었다.
"오시오! 오시오! 성령께서 내리셨습니다! 성령께서 내리셨습니다!"
교회에 돌아오니 들어가기가 어려운 지경이었다. 가득 모인 이들이 울부짖으며 굵다란 죄악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아직도 캄캄한 새벽 4시, 5시. 기도의 열기에 새벽 추위는 녹아졌다.
마을에, 미쳤다는 소문이 퍼졌다. 새벽 6시, 7시, 8시. 날이 밝았다. 기도와 회개의 고백에 아침 먹을 생각도 잊었다. 용도는 부라만 선교사에게, 이런 시간을 중단할 수 없으니 지방회를 연기할 것을 부탁했다. 부라만은 이 말을 따랐다. 신중한 기록자 피도수 선교사는 이때를 두고 "오순절의 성령강림이 재현"되었다고 한다. 50~60명이 수요일 내내 기도하였고 철야로 이어졌다.
이튿날에도 교회는 가득 찼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기도소리 오직 기도소리. 이제는 인도자도 사라졌다. 성령께서 친히 인도하셨다. 성령의 불길은 교회당 너머로 퍼져나갔다.
이날 밤에도 죄의 회개와 성령의 권능이 나타났다. 용도는 다음 날 아침에도 기도하자고 광고했다.
불과 몇 시간 뒤인 새벽 2시, 교회에 가보니 이미 많은 이들이 울며 기도하고 있었고, 6시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다시 아침 기도회.
그렇게 기도회는 밤낮 대엿새 계속되었다. 지방회는 예정보다 일주일이 늦추어졌으며 그것도 부흥회의 연장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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