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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로 좌천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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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7-07 10:19 조회5,4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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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년 10월에 이르러 이용도가 속한 감리교단은 급작스럽게 이용도를 강원도에서 서울로 불러들인다. 이용도가 강원도를 떠나는 일에 대한 세 가지 배경자료를 변종호, 피도수, 전DI 목사님의 증언으로부터 얻을 수 있다.

 

 

   변종호의 설명

   평양의 부흥회를 끝낸 후부터 부흥사로서 용도 목사의 명성은 날로 높아가고 더욱더욱 멀리멀리 알려져 1930년의 대부분도 역시 이곳 저곳의 부흥회 인도에 끌려 다녔다. 평양 중앙교회에서의 큰 역사는 앞으로 평양방면의 전도의 길을 열었고 황해도 신천교회에서의 역사는 황해도 방면에 성령의 불을 켜는 시초이어서 이 해에 이루어진 큰 역사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수상한 것은 원산지방 안의 동역자들의 눈치가 좀 이상해지는 것이었다.

   용도를 대하는 그들의 태도나 모이면 저희들끼리 쑥덕거리는 눈치가 아무래도 이상히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이상한 눈치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동역자들이 용도를 좋게 여기지 않는 마음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이름이다.

   "교회는 안 지키고 돌아다니기만 한다."

   "제 구역이나 돌아볼 것이지 남의 구역에는 왜 다니는 거냐."

   "여기저기서 용도는 왜 끌고 다니느냐."

   "제 교파 안에서나 다닐 것이지, 타 교파(장로교 등)에는 왜 다니는가."

   이는 염려해주는 말 같기도 하고 아끼는 말 깉기도 하나 그 말이 나오는 근원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은 그런 마음에 있는 것이었다.

   눈치로만 보이던 그 이상한 괴물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으로 나타났으니, 이용도가 원산지방(통천구역) 떠나게 된 것이었다. 내 교회, 내 구역에만 있지 못하고 다른 구역이나 다른 지방, 다른 교파에까지 부흥집회를 다니는 부흥사를 주일학교연합회 간사라는 부흥사업과는 아주 거리도 멀고 방면도 다른 일터로 가라는 것이었으니, 그것은 영전 같으나 좌천이었다. 아주 부흥집회를 못하게 하려는 심보에서 취하여진 것이었다.

   "너는 주일학교 사업에 소질이 있어 그리로 보낸다."

   표면상으로는 이렇게 내세우기는 하나, '너 어디 부흥집회에 실컷 다녀보아라' 하는 이면의 묘한 내용이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래서 교역자 이동의 시기도 아닌 1930년 10월 16일에 3년 동안 눈물과 땀을 흘리며 길러 놓은 정든 양떼들의 석별의 통곡소리를 들으며 용도 목사는 통천을 떠나게 되었다.

 

 

   피도수 선교사의 설명

   이용도 목사가 통천에서 서울로 파송이 된 것은 1930년도였는데 이때부터 피터스와 이용도는 한집에서 같이 살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인연이 이루어졌다. 그 이유인즉 이용도 목사를 서울로 파송할 수밖에 없는 사정이 생긴 것이다. 그때 벌써 통천지방 교역자들이 이용도에게 반기를 들고 추방운동이 일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 어떻게 된 일이었든지간에 선교부에서는 이용도 목사를 돕고자 하여 서울로 불러들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선교부에서 이용도 목사를 서울로 파송은 하였지만 실상 미리 생활대책을 세운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용도를 통천에서 떠나도록 하는 일이 목적이었기 때문이었다고 피터스 목사는 말한다.

 

 

   전DI 목사님의 설명

   전 : 강원도 외금강에 감리회의 수양관이 있어요. 거기에서 전국 감리교회 교역자 수양회가 열리는데, 이용도 목사가 강사로 초빙을 받았어. 부흥회 인도하는데, (앉아 있는 목사님들이) 양복들을 잘 다려 입고 왔는데, (이용도 목사님이) 당신들 양의 가죽을 벗겨 입고 왔냐고, 양들은 모두 빼빼 말랐는데 왜 그렇게 목사들이 살쪘냐고, 그러면서 말씀을 전하니까, 겸손한 사람들은 '아, 과연 그렇구나' 하는데, '아 저런 저, 저 젊은 녀석이 아, 우리 늙은 목사들을 책망한다'고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여기까지 종합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이용도가 구역과 교파를 초월해서 부흥회를 열고 이를 통해 크신 성령의 일하심이 나타나는 것을 감리교 교역자들이 못마땅하게 여긴 것과, 이용도가 강단에서 거침없이 목회자들의 불철저함과 양떼를 향한 희생없음을 책망했던 것이 당시 정서로는 맞지 않아 반대운동을 일으키게 했던 것이다. 그 기세가 얼마나 등등했는지 교단본부는 이용도의 생활방도도 마련해주지 못하고 가족들은 강원도에 그대로 둔 채 급히 이용도만 서울로 불러들였다 (이후 생활비는 1년 정도 피도수와 도마련 선교사가 개인적으로 보조했다). 피도수가 말하는 "원산지방을 휩쓴 성령의 역사"는 이용도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는 1928년 11월부터 이용도가 강원도에서 쫒겨나는 1930년 10월까지 "2년 동안 계속됐다."

   일제치하, 가난에 허덕이는 양떼를 몰라주고 저만 잘 먹고 잘 입던 목자들을 향한 이용도의 책망을 그들이 달게 들었더라면 원산지방과 강원도에 성령의 역사는 힘 있게 계속되어 전 조선과 만주를 복음화 했을지 모르는 일이거늘, 원통하도다!

 

 

 

"오 주님, 우리 민족은 어느 때에라야 주님이 보내주신 축복의 사자를 알아보며 존경할 것입니까? 절하며 배울 것입니까? 듣기 좋은 말로 구슬려 자기의 왕국을 세우는 이들이 교회 높은 자리를 차지하는 오늘날, 주의 종 용도 목사는 주의 양떼를 생각하며 여전히 의의 목소리를 높이나이다. 이는 주께서 오늘에까지 이용도 목사를 쓰시기 때문이겠지요. 그가 주님의 충성된 신복이었기에, 주는 오늘도 그를 통해 말씀하심이 있는 것이겠지요. 주님, 21세기 한국교회가 또 다시 의인을 정죄하고 주의 사자를 박대하여 쫒아내는 어리석음이 없게 하여 주소서. 그 화를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오,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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