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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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8-24 12:31 조회4,3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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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의 현저동 집은 물론 셋집이었다. 이 집은 서대문우체국에서 서쪽으로 1키로쯤 되는 곳으로 독립문에서는 서남 편으로 수백 미터쯤 되는 산비탈 막바지이다. 집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골목을 끝까지 올라가면 작은 언덕이 하나 나온다. 이 언덕에 올라서면 동북 편에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편에는 넓은 서대문 형무소의 전경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듯 훤하게 보였다.
언덕 아래는 경성의 환락경, 악박굴 약수터가 있고 서남 편에는 인왕산 높은 봉들이 서울 장안을 향하여 허리를 굽히고 있었다.
나는 이 언덕에 종종 올라갔다. 어떤 때는 목사님과 둘이서 올라가기도 했다. 목사님은 여기에 올라오시면 거리를 향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감옥을 바라보며 흐느껴 우실 때도 있었다. 한번은 "이 아래 담 밑에 조그만 기와집이 하나 있지요. 거기에 사형 집행하는 교수대가 있답니다" 하고 침울한 얼굴로 한숨을 지으시는 것이었다.
목사님께서 일생 동안 가장 크게 활동한 시기를 잡는다면 1931년 봄부터 1933년 봄까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동안 줄곧 이 집에서 지냈으니 수십만을 울리고 감동시키신 때도, 한국교회에게 성화를 던지신 때도 다 이 집에 계시면서 하신 일이었다. 그전에는 교회를 담임하고 또는 다른 직위에 앉아 있으면서 이따금씩 틈나는 대로 청에 따라 부흥회에 나갔으나, 1931년 6월경부터 33년 3월까지는 전임 부흥목사로 최대의 활약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일하는 동안 가족들이 이 집에서 생활의 근거를 잡게 하시고 목사님은 이 집에는 누워 본 일이 별로 없이 나다니신 것이었다. 목사님은 참으로 밖에서 사시는 분이었다. 교회의 청에 이끌려 지방으로 부흥회에 나가시고 누님에게 이끌려 산기슭으로 기도하러 나가셨다. 그러다가 말없이 지방교회 부흥회를 떠나시고는 다시 말없이 현저동을 찾아오셨던 것이다.
그 더위 속에서 두세 주일씩 땀을 쏟고 눈물을 쏟아 맥이 빠져 축 늘어진 채로 들어오시면 목사님은 집에 책가방을 던지고 그 걸음으로 또 나가셨다. 산으로 나가시면 새벽 3시나 4시가 되어서야 들어오시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아침 9시나 10시가 지나서야 들어오시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재수가 좋아 목사님이 지방에서 돌아오시는 시간에 집에 있어야 한번 목사님의 얼굴을 얼핏, 그것도 잠깐 볼 수 있었다. 만일 그 시간에 딴 곳에 계실 때면 목사님의 그림자조차도 구경하지 못하고 어느 지방으로 가셨다는 소문만 들을 뿐이었다.
그는 참으로 기도밖에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기도광(祈禱狂)이요, 기도만능주의자(祈禱萬能主義者)였다. 내가 그곳에 있는 짧은 동안에도 목사님이 들어오시지 않는 비 오는 밤을 잠을 이루지 못하고 기다리며 샌 때가 한두 번은 아니었고 눈 쌓인 인왕산을 바라보며 돌아오시기를 안타깝게 기다리던 때도 수없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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