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기독교가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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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7-26 14:15 조회4,334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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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현재의 위치
기독교회는 그의 주 그리스도의 이해를 향하여 무거운 발걸음을 오늘까지 옮겨 놓으면서 왔다. 사람의 우매가 가장 완전한 생명을 이해하기 위하여 다 통하지 않으면 안될 도정(途程)을 통하여 온 것이다. 카톨릭교회는 그 인간의 우매의 그지없음을 나타내면서도 또한 그 이교(異敎) 세계를 정복하는 임무도 다하여 왔다.
기약이 차서 개혁이 행하여져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은 일어났다. 이는 인류가 그리스도 이해를 향하여 진보한바 한 신기원이었다. 인류는 더 높은 신앙을 가지게 되고 성령은 더 높은 뜻으로 저희의 영혼에 일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세기의 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4세기 동안 사람들의 신앙은 개혁자의 종교체험 이상의 진보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
대개는 그 범위 내의 부흥이요, 개혁자들이 제창한 그 진리의 소화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개혁자들의 종교는 로마 카톨릭교회의 그것보다는 진보한 것이지만 결코 최종적인 것은 아닌 것이었다. 과연 오늘의 기독교계의 현상은 어떠한가?
옛 신앙은 그 형태가 남아 있을 뿐이요, 그 초기의 생명과 힘은 잃어 버렸고 새 신앙은 상상과 기대를 말할 뿐이요, 신앙 그 자체는 아직 오지 않았다.
옛 신앙을 가지고서는 세계가 정복되지 않는다고 새 사람들은 옛 신조를 의심하며 부인하고 새 신조를 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오늘날은 정말로 기독교계의 한 암흑시대이다. 이 혼돈하여 정돈되지 않은 상태의 기독교회에서 세계를 정복할 힘이 나올 리가 없다. 지금의 기독교회는 세상에게 져있고, 불신앙은 공연히 개가를 불러 승리를 자랑하는 시대이다.
개혁자들의 신앙, 이는 저희들에게는 생명이 되어 있었으며 세상을 정복할 듯한 힘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저희가 제창한 진리는 인류의 영계에 한 획기원적인 양식(糧食)이 되었다.
그러나 그 후 4세기를 지난 오늘 인류의 영적 생명은 다른 새 양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또 그때 개혁자들의 성서관, 속죄관으로써 오늘의 세계를 정복하기에는 세상이 너무 변하여 버렸다.
그래서 오늘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하여는 오늘의 세계정세에 상응한 폭탄(복음)이 필요한 것이다. 대개 현재의 이 혼돈 동요를 초래하게 된 것은 인류의 영혼으로 하여금 더 근본적인 무엇을 붙잡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인 줄 안다. 지금은 인류의 영계의 혁명기이다. 사람들은 더 근본적인 것, 그리고 또 새 영의 양식을 섭취함으로써만 다시 생기를 얻으며 산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영의 운동, 그 생명의 활약이 마치 신약시대와 같음이 있기를 20세기의 오날날에도 기대하는 바이다.
1931년 1월 18일 (일)
이용도는 나름의 역사신학적 통찰을 풀어내면서, 16세기 종교개혁으로부터 4세기가 더 지난 20세기의 초두가 요구하는 기독교에 대해 고민한다. 그는 1900년 기독교 전통을 이어가면서도, 그의 시대에 적합한 새 양식을 찾는다.
"새 영의 양식", "영의 운동", "생명의 활약", "신약시대와 같음"(즉 초대교회적 기독교) 등의 표현을 씀으로써, 그가 생각하는 "새 양식"이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힐끗 가늠케 한다. 당시까지 서구 교회는 걸맞는 영광을 돌려드리지 못하였던 성령 하나님을 높임으로 성 삼위께로 합당한 영광을 올려드리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마음과 삶에서 경험되고 드러나는 생명이 꿈틀대는 기독교 아니었을까.
이용도의 때로부터 한 세기가 지났다. 현대인은 지식정보의 홍수 속에 휩쓸리며 살아간다. 재미난 것은, 시대가 지식정보로 경도될수록 사람들은 더 직접적인 체험을 갈망하는 점이다. 관념적 기독교는 도태되고 체험적 기독교는 확산될 것이다.
동시에 21세기는 나의 지역적(local) 특성을 분명히 하면서도 또한 다른 지역을 존중하고 이해하는 세계적(global) 특성이 함께 요구되는, 즉 주체성과 이해심이 동시에 필요한 시대이다. 신앙적으로 생각해보면, 각 교파와 신앙공동체마다 다른 신학적 정향과 이상을 가지고 있으나 자기 것에 대한 깊이가 있으면서도 다른 쪽의 좋은 것도 배우고 누릴 수 있는 기독교를 기대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온전한 기독교에 한 걸음 더 다가가게 될 것이다.
이때 주의할 점은 자기 교파/기관/공동체를 세계의 '중심'으로 여기는 것이야 제 마음이겠지만, 남을 부정하는 방식 가령 집단감정에 호소하여 상대방 깎아내리기, 이성적 판단이 빠진 힘의 횡포 등을 활용하는 집단은 결국 그 자신이 배척과 비난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발견케 될 것이다.
또한 한국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문화적 DNA를 탐구함으로써, 수입산만 먹는 게 아니라 이제부터는 더욱 한국산을 맛보는 것이 새 시대가 요구하는 기독교일 것이다. 이를 위한 노력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모든 성도의 고민과 사명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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