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에서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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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9-22 17:09 조회5,122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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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정 집회는 간도의 청년들에게도 신앙생활의 기폭제가 되었다. 그중 갓 스물을 넘긴 한 젊은이는 시간이 수십 년 흐른 뒤, 신학대학장의 자리에서 이때를 회고하며 아래와 같은 글을 남겼다.
내가 이용도 목사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1931년 봄 만주 간도 용정(龍井)에서였다. 이 목사님에 대하여 지나가는 소문은 많이 듣고 있던 차인데 그가 만주를 찾아오신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에게 크게 자극적인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30리 밖 '동성용'이란 곳까지 마중을 나갔다. 나타난 그는 회색 동정 단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약간 야윈 30대의 젊은이였다. 말이 없고 평화스러운 얼굴에 빛나는 눈에는 어딘지 모르게 따뜻한 자애와 순결한 거룩함이 깃들어 있었다.
집회는 용정 감리교 예배당에서 모였다. 첫날 밤부터 초만원을 이루었다. 사회자가 개회를 선언하고 여러 장의 찬송을 불렀다. 그러는 동안 그는 강단에 납작 엎드려서 일어나지 아니했다. 얼마를 지난 후에야 일어나서 성경을 읽고 기도를 올리었다. 기도를 올리는데 뼈에 사무치도록 절절한 기도였다. 기도는 계속 되었다. 격하여 목이 메었다. 장내는 강한 반응을 일으켰다. 한참 동안의 기도에서 분위기는 용광로와 같이 뜨거워졌다.
설교를 시작했다. 원고를 사용하거나 시간을 짧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강단에 서자마자 포와 같이 기관총과 같이 불을 뿜는 것이었다. 설교 내용의 절실함과 표현의 적절함, 중심서 끓어 넘치고 폭발하는 충정의 권면, 설득, 경고, 책망, 위로, 격려의 말은 마디마디 사람의 가슴을 흔들고 마음을 찔렀다. 설교는 1시간이나 1시간 반을 계속하고 때로는 2시간을 계속해도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지루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고 그야말로 취한 듯이, 얼빠진 듯이 황홀하게 앉아있었다. 내가 지금까지 40여 년에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설교를 들었지만 이용도 목사의 설교처럼 내 심령 깊이 흔들고 은혜가 넘치는 설교를 들려준 이는 아직 한 사람도 없다. 아마도 하늘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기까지는 전혀 그런 설교를 들을 길이 없을 것이다.
설교가 끝나면 그는 다시 강단에 엎드려서 다시 묵상 기도를 드리었다.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돌아가고 밤이 깊어 1시, 2시가 되어도 꼬박 강단에서 기도로 밤을 새웠다. 집회가 계속하는 동안에 1주간이건 2주간이건 꼭 같은 싸움을 끝까지 계속하셨다. 그때 그는 성경공부 시간에 '아가서'를 가르쳤다. 그의 설교는 사람을 사로잡았지만 그의 성경강해는 사람들을 얼빠지게 해 주었다. 그는 놀라운 웅변가였고 보기 드문 문학가적 소질을 구비했었다. 그리스도와 신자의 아가페적 사랑의 교제를 풍부한 문학적 감정으로, 영적 경험을 능하고 기묘한 표현으로 설명해 내려갈 때에는 모두 무엇에 홀린 사람들처럼 멍청하게 얼빠져 있었다. 내가 일찍이 재미있는 책을 많이 읽고 말 잘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꽤 많이 들었지만 그분의 '아가서' 강해처럼 심취하고 가슴이 뛰었던 일은 아직 한 번도 없다.
그의 설교와 성경강해가 많은 사람과 나를 그토록 감동시킨 것은 단순히 그의 말재주와 지식과 타고난 문학적 웅변적 소질의 소산만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그에게서 꼭 같은 무엇을 느꼈다. 그것은 바리새교인들이 예수에게 대해 말한 것처럼 일반 설교자나 교수들이 가지고 있지 못한 영적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영력의 사람이었고 기도의 사람이었다. 분명히 기도의 힘과 성령의 힘이 그의 말을 힘 있게 해 주었다. 능력 있고 감동하는 말씀으로 만들어 주었다. 주 앞에서는 겸손한 태도, 주님의 영광과 뜻만을 받들어 살려는 간절한 마음, 깨끗하고 거짓 없이 살려는 일편단심, 주님의 진리와 사랑을 더 깊이 알려는 소원이 그를 그렇게 만든 것 같다.
나는 일찍이 그의 말에서 거짓이나 꾸밈을 찾아보지 못했고 그의 태도에서 교만이나 미움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 부드러움, 그 자애로움, 그 겸허함이 나에게 큰 위안과 격려와 교훈을 준다. 그는 짧게 살았다. 그러나 굵게 살았다. 1933년 10월 2일 아직도 30대를 다 못 넘긴 33세의 젊은 나이에 몇 사람에게 들리어서 외로이 숨져갔고 그의 무덤은 원산 산제동에 평토장으로 묻혔다. 아까운 죽음이었고 애석한 요절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도 우리들 마음속에 살아있다. 성경대로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던 그의 열심이, 주님의 뜻만을 위해 살고 주님만을 위해 살려고 발버둥치던 그의 소원이 아직도 수없이 많은 영들 속에 살아있다.
여기까지, '부름 받아 나선 이 몸'의 작사가 고(故) 이호운 목사님의 회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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