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정으로 달려간 눈물
페이지 정보
작성자 mapocmc 작성일17-09-19 12:08 조회4,972회 댓글0건관련링크
본문
이용도는 1931년 4월 19일 저녁 용정에 도착했다. 용정은 만주 한인의 중심지였다. 1919년 만세 운동 당시에는 재만한인(在滿韓人) 2~3만 명이 용정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읽고 만세를 외치며 '대한독립'이라 쓴 깃발과 태극기를 들고 시가행진을 전개했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중국 군대를 책동했고, 군의 발포로 한인 17명이 순국하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는 일이 있었다. 같은 달 17일에는 용정에서 다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나 태극기가 피를 토하며 바르르 여린 몸을 떨었다.
이용도가 용정에 도착할 때까지의 상황은 아래와 같다.
이용도는 1931년 4월 16일 목요일 서울에서 밤기차를 타고 함경북도 회령으로 향했다. 이호빈이 사역하는 북간도에서 집회가 열릴 참이었다.
이용도는 용정에서 20리에 있는 동성용(東盛湧)역으로 마중 온 이호빈을 만났다. 둘은 기차 안에서 서로의 손을 꼭 잡고 나란히 앉아 용정역으로 행햤다. 오랜만에 용도를 만난 호빈은 어딘가 용도가 전과 다른 것을 느꼈다. "그리도 맵시를 잘 내던 샛치꾼"은 "아주 어수룩한 산골 서방님"이 되어 언어와 동작에 매무새까지 딴판이 되어 있었다. 또 그리도 말 잘하던 용도는 호빈 형님의 손만 힘 있게 쥐고 있을 뿐 그의 입은 돌처럼 봉해져 열릴 줄을 몰랐다.
용도의 콧김이 이따금 거칠게 부르르 떨려 나오고 굳게 다문 입술로 차창 너머의 먼 산을 때때로 응시할 뿐이었다. 용도는 "왜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다들 평안하신지요?" 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로의 숨소리와 눈가에 고인 눈물만으로 일생에 주고받을 말을 다한 듯했다. 용도는 숨결과 눈물 한 방울로 자기가 할 말을 모두 호빈에게 전하였고, 호빈은 넉넉한 신앙인격으로 그 의미를 해독했던 것이다. 많은 말보다 꾹 잡은 손, 뜻 없는 웃음보다 눈물 한 조각이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었다.
창밖의 풍경을 내다보던 용도는 궁금한 것이 생겼다. 양의 우리 같은 것이 계속 보였기 때문이다.
"형님, 저것들이 무업니까?"
"저 큰 집은 중국인 지주가 사는 집이고, 작은 것들은 우리 형제가 사는 농막이지."
당시의 만주 한인들은 중국인 대지주 밑에서 어렵게 일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동포들의 고생을 눈으로 접하면서 용도는 용정역에 도착할 때까지 애타는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호빈은 이렇게 변한 용도에게서 "전에 맛보지 못하던 뜨거운 맛"을 느꼈다. 용도가 "본래 뜨거운 맛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전에 비하여 그 질과 정도가 훨씬 달라져" 있었다. "말 잘하던 달변가"는 "무언의 침묵자"로 변했고, "애교만만한 사교적인 활동가"는 "눈물 많은 기도자"로 바뀌었다. 가장 크게 변한 것은 "신앙"이었다. 호빈의 눈에 용도는 "인본주의(人本主義) 신앙에서 신본주의(神本主義) 신앙"으로, 두뇌의 신앙에서 가슴의 신앙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용도의 집회에는 믿는 자들만 아니라 구경꾼에다가 불신자들까지 몰려들었다. 집회 정각 전에 예배당은 물론 문밖까지 만원이었고, 집회가 끝나도 은혜에 겨운 사람들은 돌아가려 하지를 않았다.
용정 감리교 예배당에서 열린 첫날 밤 집회는 시작부터 충격이었다. 사회자가 개회를 시작하여 찬송을 부르는데 용도는 강단에 납작 엎드려 기도만 하는 것이었다. 얼마 후에 일어나서는 성경을 읽고 긴 기도를 시작했다. 듣는 이들은 가슴이 격해져 목이 메여왔다. 한참 계속되는 기도에 장내는 용광로처럼 달아올랐다.
첫날 저녁 용도가 한없이 부른 찬송은 오는 길에 보았던 동포들의 아픔과 관련 있는 곡이었다.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일동의 찬송이 시작되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없이 다니니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예수 예수 내 예수 마음 아파 울 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 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하소서
예수 예수 내 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타지에 나와 농노처럼 고생하는 동포들을 생각할 때 울음을 그치지 못하였다. 용도는 "헐벗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을 향해 늘 아픈 마음을 안고 산 사람"이었고, "그들 때문에 울고 그들 때문에 피를 쏟은 사람"이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