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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 (1703-17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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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09-28 22:12 조회2,3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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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 (1703-1791)

 

  웨슬리는 전도자, 신학자, 그리고 사회 개혁자로 일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웨슬리의 이러한 세 면과 관련된 중요한 사항을 초반기, 중반기, 그리고 후반기로 나누어 간략하게 살펴 보고자한다.  

 

 

제1장 웨슬리의 학창시절부터 사제가 되기까지

(1703-1728)  

 

 1. 엡워쓰(Epworth)의 웨슬리

 

   존 웨슬리는 1703년, 영국의 동부지역인 링컨(Lincoln)주(州)의 조그만 마을 엡워쓰의 한 영국 국교회 사제관에서 사무엘(Samuel)과 수산나(Susanna)의 열 아홉 명의 자녀 중, 열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사무엘은 성실한 목회자였고, 어머니 수산나는 엄격한 가정교사였다. 그들은 철저히 청교도적이어서 근면, 검소, 정직 등의 덕목을 매우 중시하였다. 특별히, 수산나는 식당을 교실 삼아 어린 자녀들에게 기도문과 원어성경 그리고 일반과목을 가르칠 뿐만 아니라, 당대의 청교도들이 힘주어 강조한 대로, 자녀들의 의지가 부모와 하나님 앞에서 전폭적으로 굴복되어야함을 강조하였다. 웨슬리는 11살이 될 때까지 이러한 부모의 영향아래서 보내게 되었으며, 이것은 그의 인생 전체의 기틀이 되었다.

    웨슬리가 6세 되던 1709년에 원인불명의 화재로 목사관이 한밤중에 전소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때 웨슬리는 화염에서 구사일생으로 건짐을 받게되었으며, 이것은 웨슬리의 가슴속에 항상 남게 되었다. 그는 성경의 말씀을 인용하여 자기 자신을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슥 3:2)라고 하였다. 어머니 수산나는 이 화재사건에서 구원을 받은 웨슬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 속에 있는 것으로 해석하였으며, 웨슬리 스스로도 이 사건을 신앙적인 차원에서 받아들였다. 

 

 

2. 웨슬리의 학창 시절(1714 - 1724)      

 

    웨슬리는 11살 때인 1714년에 당시의 명문 챠터하우스(Charterhouse) 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하여 정든 고향을 떠나 런던(Lodon)으로 갔다. 웨슬리는 어머니이며 가정교사였었던 수산나를 통해 익힌 기초과정 위에 중등과정의 학문을 이곳에서 연마하였다. 고전 문학을 배웠으며 특별히 라틴어 시와 문학을 즐겼다.  

    웨슬리는 만 17세인 1720년에 챠터하우스 졸업한 후 우수 장학생으로 옥스포드(Oxford) 대학교의 인문계열의 대학인 크라이스트 쳐치 칼리지(Christ Church College))에 입학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챠터하우스에서 처럼 고전문학과 라틴어 시를 폭넓게 공부할 뿐만 아니라 희랍어 성서를 연구하고 여러 분야의 신학서적을 탐독하였다. 나아가 셰익스피어, 밀턴, 스펜서 등의 문학서적을 읽고 물리서적도 가까이 하였다. 웨슬리는 1724년에 문학사 학위를 받고 그 대학을 졸업하였다. 

 

 

3. 링컨 대학 연구원과 엡워쓰의 부사제로서 웨슬리(1724 - 1728)

 

    옥스포드 대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는 더 공부한 후에 안수를 준비하도록 권했으나, 어머니 수산나는 가능한 한 속히 안수를 받도록 권장하였다. 교회의 사역에 관심이 있었던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교 교구감독 (Bishop)에 의한 사제 안수 고사(examinations for ordination)를 위하여 소정의 과목을 진지하게 공부하며 준비하였다.  특별히 17세기의 고교회주의자들(the high churchmen)과 교부 신학서적을 탐독하였으며,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교회 직제를 이때부터 그리스도인의 행동지침으로 삼게 되었다. 웨슬리는 마침내 1725년 9월에 옥스포드 감독에 의하여 서리 사제(deacon) 안수를 받고 그 주일에 첫 설교를 하였다. 

    웨슬리는 옥스포드 대학교 졸업 이후에 그의 신학 훈련과  신앙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일련의 신비주의적인 서적들을 읽게 되었다.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의 거룩한 삶과 죽음의 규범과 실천(Rules and Exercises of Holy Living and Dying),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의 그리스도를 본받아(Immitatio Christi), 

    윌리암 로(William Law)의 기독자의 완전 (Christian Perfection)과 경건한 부름 (Serious Call)등의 서적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완전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부터 웨슬리는 매일 일기를 쓰면서 시간 사용을 비롯한 모든 면에 엄격한 생활을 하였으며, 성경을 읽을 뿐만 구체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안수를 받은 웨슬리는 링컨 대학 연구원 (Fellow)으로 일하다가 소정의 시험을 통과하여 1726년 3월에 교수로 임명되었다. 1727년부터 엡워쓰에서 목회하는 아버지를 돕던 가운데 포터(Potter) 감독에게 사제(priest)안수를 1728년에 받았다.

 

 

 

제2장 신성클럽과 선교사 시절과 웨슬리의 회심

(1729-1738)

 

 1. 신성클럽(holy club)의 지도자 웨슬리 (1729 - 1735)

 

    웨슬리는 링컨 대학의 부름을 받아 강의를 하기 위하여 1729년에 엡워쓰를 떠나 옥스포드로 되돌아 왔다. 이때 동생 챨스를 중심으로 소수의 학생들이 학문과 경건의 훈련을 위하여 신성클럽을 조직하여 정기적으로 모이고 있었다. 성경과 신앙서적을 읽기에 전념하며, 성만찬 예배를 중요시하는 모임이었으며, 웨슬리는 자연스럽게 이 모임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들은 감옥을 방문하여 죄수들이 필요로 하는 음식과 의복을 공급하고 그들이 진 부채를 갚아 주기도 하였다. 또 죄수들과 그들의 자녀를 위한 교육프로그램도 만들었고, 이것이 발전하여 시내 거주자의 자녀들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옥스포드 주변의 공장과 작업장을 찾아가서 그들이 영적으로, 육적으로 필요한 부분을 돕기도 하였다.

    또한 신성구락부는 초대교회의 신학을 연구하며 성만찬 예배와 금식기도 등의 경건 훈련에 전념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규칙적이고 엄격한 생활을 보고 사람들은 그들을 가리켜 규칙주의자들(Methodists)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것이 감리교회의 명칭이 되었다. 

 

 

2. 선교사 웨슬리 (1735 - 1737)

 

    웨슬리는 신대륙의 조지아(Georgia) 주에서 선교사역을 하기 위하여 1735년 10월에 런던을 떠났다. 대서양을 횡단하던 웨슬리는 미국에 도착하기 약 10일전인 1736년 1월 25일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때 그와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기도와 찬송을 하는 무리가 있음을 발견하였는데, 그들은 영국을 출발할 때부터 함께 하였던 모라비안(Moravian) 교도들이었다. 웨슬리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최초로 발견하였으며, 동시에 그와는 달리 평안한 가운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모라비안 교도들로 부터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모라비안 교도들은 독일의 루터 전통의 경건주의 생활을 주장하는 이들로서, 독일을 떠나 웨슬리처럼 조지아 주로 가고 있었다. 웨슬리는 그들과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들 안에 있는 깊은 신앙을 발견함과 동시에, 그들이 신학적으로는 영국국교와는 차이가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1736년 2월 6일에 미국에 첫 발을 내디뎠으며, 조지아주의 사반나(Savannah)촌락에 도착한 웨슬리는 그 곳 사람들에게 무도회를 금하고, 여인들은 사치를 금하는 등, 엄격한 신앙 생활을 강조하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곳에서 두 가지 문제로 마음에 갈등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자신과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대한 믿음(확신)의 문제였고, 또 하나는 한 여인과의 사랑에 관한 문제였다.   

    웨슬리는 소피 합키(Sophy Hopkey)라는 여인에게 청혼할 정도로 연심을 가졌으나 그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주저할 때, 합키는 윌리암슨(Williamson)과 결혼을 하였다. 웨슬리는 이들이 결혼하기 전에 사반나의 담당 사제인 자신에게 사전통보를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이 나태해졌다는 이유를 들어, 그들이 성만찬에 참예하지 못하게 하였다. 합키와 윌리암슨은 자신들이 웨슬리에게 모욕을 받았으며, 웨슬리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법정에 고소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이것이 사적인 감정에 의한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문제라고 항변하였으며, 배심원들도 그의 입장을 충분히 변호하였으나, 상황은 악화되어 마침내 웨슬리는 1737년 12월 22일에 챨스타운(Charlestown)에서 영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3. 웨슬리의 회심(1738)

 

    1738년 2월 1일에 영국에 도착한 웨슬리는 심신이 매우 피곤하였다. 미래가 불확실하였다. 링컨 대학에서 가르치며 신성구락부 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으나 깊은 좌절에 빠진 그에게 있어서는 믿음과 구원의 문제가 절박하였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은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는 것이었다. 그러던 웨슬리에게 무거운 짐이 되었던 구원의 문제가 해결되는 순간이 찾아왔다. 1738년 5월 24일 오후 8시 45분쯤 런던 시내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거리에 있는 교회에서 한 예배 사회자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읽는 도중 웨슬리는 구원의 뜨거움을 체험하게 되었다. 그 날의 일기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나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올더스케잇 거리로 가서 한 신도 모임에 참석하였다. 거기에서 한 사람이 루터의 로마서 서문을 읽고 있었다. 8시45분 경, 그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변화의 역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을 때, 이상하게 내 마음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오직 그리스도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한가지 확신이 생겼는데, 그리스도께서 나의 모든 죄를 사하셨으며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하셨다는 확신이었다.”

   존 웨슬리는 그 길로 동생 촬스(Charles)를 찾아가 “나는 믿는다.”라고 외쳤다.  

 

 

 

제3장 웨슬리의 전도 운동

(1739-1751)

 

 1. 브리스톨(Bristol) 집회  

 

    웨슬리가 대중의 지도자요 설교자가 되는 전초전은 브리스톨에서 1739년 4월 2일에 행한 옥외설교였다. 이사야 61장 1절을 본문으로 한 옥외설교는 놀라운 반응을 보였다. 그 이후 그는 순회전도자로서 마상(馬上)여행을 시작하였고, 가는 곳마다 날씨에 관계없이 몰려든 무리들은 회개와 회심의 변화를 갖게 되었다.  

    웨슬리는 소그룹 모임을 만들었으며, 1739년 6월에는 땅을 구입하여 뉴 룸(the New Room)이라는 건물을 신축하였다. 순회설교를 통한 회심자가 늘어감에 따라 영국국교회의 교구 목사들은 웨슬리의 그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이에 대해 웨슬리는, 자신은 옥스포드 대학 교수로서 어느 특정교구에 소속되어 있지 않으며 안수를 받은 제일의 목적은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라고 주장하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이다”라고 항변하였다. 옥스포드의 신성구락부원들이 옥스포드 감옥소의 죄수들과 그 자녀들 그리고 빈민가의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였듯이, 브리스톨의 집회가 활발하여짐에 따라 광부들의 자녀와 노년들을 위하여 킹스우드(Kingswood)에 학교를 세웠다.

 

 

2.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결별

 

   브리스톨을 중심으로 신앙운동이 활발히 전개될 때 런던에서는 웨슬리가 원하지 않는 분열현상이 일어나게 되었다. 모라비안 교도들과 웨슬리가 함께 시작한 훼터레인(Fetterlane)의 무리들이 모라비안 설교자 몰터(Molther)의 극단적인 정적주의(Quietism or Stillness)를 추종하게 되자 웨슬리는 모라비안 교도들과 결별하게 되었다.  

    화운더리(Foundery)모임이 런던에서 출범되었고 웨슬리의 독자적인 신앙 운동이 출범하게 되었다.  웨슬리는 모든 신도들에게 일종의 회원증과 같은 표(ticket)를 부여하였다. 신도 연합회(United Societies)를 조직하고, 그 구성원들은 다시 소집회(band, class meeting)로 나누어 신앙훈련을 강화하였다.  

 

 

3. 반대와 비난과 박해

 

   웨슬리의 신앙운동이 평탄하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웨슬리가 어느 해 신년 첫날에 엡워쓰에 갔을 때 그곳의 목사 로밀리(Romilly)에 의하여 성만찬 예배참석을 거부당하였다. 그는 선친의 묘비에서 설교를 하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비록 그는 영국국교의 가르침에 충실하였으나 그의 행보는 당시의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에게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친근감을 표시하는 감독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웨슬리의 옥외설교와 평신도 설교자들의 사역에 대하여는 분명히 부정적인 반응을 표시하였다. 특히 대부분의 교구 사제들은 웨슬리의 신앙 운동을 노골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들에 따르면 웨슬리는 그들의 신자들을 회유하여서 불법적인 집회를 가지며, 이로 인하여 자신들의 목회가 실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웨슬리에게 설교할 기회를 일체 주지 않았다. 웨슬리의 설교는 믿음에 의한 구원, 구원의 확신, 온전한 성결 체험, 죄로부터의 자유 등이 골격을 이루었으며, 영국 성직자들에게는 이러한 신학이 행위를 무시하고 감정적인 신앙을 부추긴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웨슬리의 신도들을 “광신주의” 혹은 “반 도덕주의” 라고 몰아 부쳐 반대하였다.  

    영국교회의 성직자들의 반대 못지 않게 웨슬리의 신앙운동을 괴롭힌 일단의 무리들이 있었다. 이들은 웨슬리와 순회전도자들이 설교할 때 나타나 설교를 못하도록 소동을 피웠다. 심한 경우에는 성난 소를 설교단상 방향으로 몰아 부치기도 하였다. 이들은 웨슬리의 죄를 꾸짖는 설교를 싫어하였고 자신들의 생활이 방해받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웨슬리의 설교가 신학적으로 잘못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웨슬리의 신앙운동은 더욱 활성화되고 일반화됨에 따라 이들의 반대소동은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1747년경에는 전국에서 폭도들의 소요를 단 한 차례도 볼 수 없게 되었다. 웨슬리와 그의 신앙운동은 전국적으로 알려지고 인정을 받게 되었으며, 상대적으로 노골적인 반대도 수그러들었다.  

 

 

 

제4장 연회 조직과 웨슬리의 사회운동

(1751 - 1791)

 

 1. 평신도 설교자의 활동

 

   웨슬리 생애의 마지막 40년간은 그의 신앙운동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뿐만 아니라 확장하는 기간이었다. 웨슬리의 운동이 급속도로 확산될 수 있었던 여러 이유가운데 하나는 평신도 순회전도자들의 활약이었다. 웨슬리는 그들을 직접 선발하고 임명하였으며 신앙적인 훈련과 더불어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그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이었고, 지적으로도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한 상태였었다.  때문에, 웨슬리는 그들이 성서 읽기와 기도생활에 전념할 뿐만 아니라 하루에 최소 5-6 시간 책을 읽도록 강조하였다. 이들은 1751년에 68명이었으나 1784년에는 192명으로 증가하였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훗날 영국 국교회와 비 국교회의 성직자가 되었다. 이들 중에는 웨슬리를 떠난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그것은 웨슬리와 신학적인 견해 차이로 떠난 사람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웨슬리의 끊임없는 요구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2. 신도회와 연회의 조직 

 

   웨슬리 신앙운동의 최고의 행정조직체는 설교자들로 구성된 연회(年會)였다. 1744년 6월 25일부터 6일간 런던 화운드리에서 조직된 이래 웨슬리의 주도 아래 신학적인 확립과 설교자 임명과 파송 등에 관한 제반 사항을 논의하고 결정하였다. 1751년에 웨슬리 형제는 설교자들이 갖추어야 할 7가지 사항(이해력, 기억력, 성서와 희랍어와 철학 등에 관한 지식, 사고력, 상식, 양육, 음악성과 설교 전달법)을 작성하였다.

    웨슬리 운동의 조직은 대도시에 연합신도회(United Society)가 있고, 이것은 속회(Class meeting)로 나누어지고, 속회는 다시 소그룹(band)으로 나누어졌다. 1742년 2월 15일, 브리스톨에서 시작된 속회에서는 회원들의 상호 신앙상태를 점검하며 권면하였고, 필요할 때는 연합회 활동을 위한 헌금을 하였다. 이들은 정기적으로 만나 그들의 잘못을 고백하고 함께 기도하였다. 소그룹 지도자가 먼저 자신의 최근의 삶을 고백하고 돌아가면서 어떻게 승리하고 실패하였는지를 말하게 하였다. 이들의 모임이 기본적으로는 신앙의 권면을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친교도 도모하였다. 세속적인 오락행위는 없었지만 차를 나누고 담소하며 생활품을 필요에 따라 나누기도 하였다. 환자들을 심방하고 가난한 자들의 궁핍함을 살폈다. 

 

 

3. 후계자 문제

 

   웨슬리가 노년에 접어들면서 후계자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지만, 그의 사후의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되는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다. 동생 챨스는 세월이 흐를수록 웨슬리와 그의 신앙운동에 대하여 형과 다른 견해를 갖게되고, 신학노선에도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웨슬리는 1773년에 존 훌레쳐(John Fletcher)를 후계자로 택하였으나, 겸손한 그는 이를 사양하였다.  더욱이 건강이 좋은 상태가 아니었던 그는 웨슬리보다 6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유력한 다른 한 사람은 토마스 콕(Thomas Coke)이었다. 콕은 원래 영국교회의 신부였으나 웨슬리의 신앙운동에 깊이 관여함에 따라 1776년에 영국 국교회에서 떠나게 되었다. 그는 1784년에 신생독립국 미국으로 떠나게 됨에 따라 미국에서 감리교 운동을 계속하게 되었다.  

 

     

4. 안수문제

 

   1783년에 미국의 독립전쟁이 종결될 즈음에, 미국에서의 웨슬리 신앙운동의 신도들은 애즈베리(Asbury)를 통하여 성례전을 집례할 수 있는 성직자를 파송할 것을 급히 요청하였다. 독립전쟁을 치르는 가운데 영국교회의 성직자들은 모두 영국이나 캐나다로 돌아가고, 애즈베리를 제외한 모든 순회전도자들도 영국으로 귀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미국의 신도들이 세례나 성만찬을 받을 수 없게 되었음을 알게 된 웨슬리는 런던 감독에게 그들에게 성례를 베풀 수 있는 성직자들을 파송할 것을 요청하였다.  런던감독은 웨슬리에게는 개인적으로 친근하게 대해 주었지만, 그의 요청을 당시의 영국과 미국의 민감한 정치적 상황에서는 수락할 수 없었다. 미국의 상황이 급박하여 짐에 따라 웨슬리는 토마스 콕(Thomas Coke)을 감독(superintendent)으로 임명하고, 리차드 홧코우트(Richard Whatcoat)와 토마스 베이지(Thomas Vazey)를 목사(Elders)로 1784년 10월 연회에서 안수하였다.

    이 세 사람은 11월 3일에 미국에 도착하였고 같은 해 12월 25일에 미국동부의 발티모어(Baltimore)에서 열린 연회(年會)에 참석하였다. 이틀 뒤인 27일에 토마스 콕은 애즈베리를 감독(Superintendent)으로 안수하고 여러 사람을 목사로 안수하였다. 이 문제로 웨슬리는 영국국교로 부터 심한 비난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동생으로부터도 질책을 받았다. 웨슬리의 안수행위는 영국교회로부터 이탈하려는 시도로 해석되었기 때문이었다. 

 

 

5. 웨슬리의 사회운동

 

   웨슬리는 정치적으로 항상 보수주의자로서 부모와 함께 왕권을 지지하는 토리(Tory)당의 정치철학을 초지일관 견지하였다. 영국이 프랑스와 7년 전쟁을 치루는 기간에는 지원병을 모집하는데 적극협력하기도 하였고, 영국 헌법이 자유를 보증하는 가장 우수한 법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영국의 사회와 경제의 문제에 있어서는 예리한 비판을 아끼지 아니하였다. 예언자적인 자세로 사회와 경제 부조리의 원인을 지적하고 해결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는 밀을 부유한 자들의 말먹이와 술을 빚는데 과도하게 소비하는 것을 금하기도 하였다. 또한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작업장을 만들고 직업을 창출하였다. 옥스포드의 신성구락부 때부터 행한 감옥 방문과 킹스우드 학교를 통한 가난한자들에 대한 관심은 노인에게까지 확산되었다.  

    웨슬리는 노예 해방을 주장하였다. 웨슬리는 노예제도를 “모든 사악함의 총합체”라고 규탄하였고, 1788년에는 노예시장의 중심지인 브리스티오(Bristio)에서 노예제도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설교를 하였다. 웨슬리는 1791년 2월 24일에 당시의 저명한 정치인 윌리암 윌버훠스(William Wilberforce)에게 편지를 보내 노예폐지 운동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도록 강한 어조로 권면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나가시오. 인류의 역사가 태양을 본 이래  가장 사악한 악(惡)인 노예제도가 영국과 미국에서 사라질 때까지 투쟁하시오!”

 

 

결  론

 

   웨슬리의 초기는 영향을 받던 시기였다. 부모로부터 종교와 정치와 삶의 철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이것은 일생을 통하여 계속되었다. 일생을 거쳐 영국국교회로부터는 배척을 받았지만 그는 일생동안 영국국교회의 신부로 남아있었고, 그의 신도들이 영국국교로부터 분리하기를 주장할 때마나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정치적으로는 왕권지지의 토리주의자였으며, 생활은 철저한 청교도 주의자가 된 것도 부모의 영향이었다.  

    옥스포드에서 졸업한 직후에 읽은 신비주의적 신학자들의 글도 그의 일생전체에 걸쳐 중대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님을 섬기되 한 마음을 품고 전폭적으로 순종하고 헌신하는 거룩한 삶, 곧 “그리스도의 완전”을 추구하게 되었다. 웨슬리의 모라비안 교도들과의 만남은 그가 지금까지 받은 이론적인 신학과 성서의 가르침이 개인적인 체험으로 실제화 되게끔 하였다.  몇 가지 신학적인 견해차이로 모라비안 교도들과 결별을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의 믿음에 의한 구원 체험, 성령의 내적인 증거, 소그룹을 통한 신앙 훈련 등은 웨슬리의 신앙운동의 골격이 되었다.  

    중반기와 후반기의 웨슬리는 초반에 받은 영향에서 벗어나 대중의 지도자로 영국 국교회와 사회의 개혁을 부르짖게 된다. 정치적으로는 보수주의를 견지하지만 종교적으로는 영국국교의 기본신학과 법규를 준수하면서도 옥외설교를 하며, 평신도 전도자를 임명하고, 심지어는 안수까지 시행하는 진보적인 노선을 “복음전파와 선교”의 이름아래 수행하였다.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윌리암 로(William Law), 모라비안 교도들과 결별을 하면서도 그들의 모든 것을 결코 버리지는 않았다. 이것이 웨슬리의 삶과 신학과, 신앙운동의 특징이다. 그의 신학은 인간의 죄성과 더불어 죄에서 벗어나는 것을 함께 주장한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 믿음과 행함, 개인과 사회, 보수적인 정치관과 진보적인 사회관등을 함께 주장하는 “기독교적 변증법”이 그의 신학의 원리가 되고 신앙운동의 원천임을 깨달을 때 그의 생애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              

 

 

 

존 웨슬리(John Wesley)의 생애연표

(1703-1791)

 

1703.   6. 17.   링컨(Lincoln)주 엡워쓰(Epworth)에서 출생

1709.   2.   9.   목사관 화재에서 구사일생으로 구출됨

1714.   1. 28.   런던에 있는 차터하우스(Charterhouse) 사립학교 입학

1720. 12. 24.   옥스포드 대학교 크라이스트 쳐취(Christ Church)대학 입학

1724.                크라이스트 쳐취 대학 졸업 (B. A.) 

1724. - 1725.   사제의 길을 걷기로 결단     

1725.                제레미 테일러(Jeremy Taylor)저서를 통해 거룩의 삶 추구

1725.   9. 19.   서리 사제(Deacon) 안수, 옥스포드 대학교 교구감독 포터(Potter)가 집례하다.

1726.   3. 17.   링컨대학교 교수(Fellow)로 선발되다. 

1728.                엡워쓰에서 보조 목회하던 가운데 안수 받다.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포터 감독이 집례하다. 

1729.                엡워쓰에서 링컨 대학으로 돌아오다.

                          신성구락부(the Holy Club)의 지도자가 되다.

1735. 10. 21.   복음선교단(S.P.C.K.) 기관사제(Chaplain)로서

                          미국의 죠지아(Georgia)주(State)를 향하여 출범하다.

1736.   1.          폭풍으로 죽음의 공포 속에 처하여 있을 때 26명의 모라비안  교도들          

                          (the Moravians)의 평안한 상태를 보고 충격을 받다.

1736.   2.  1.     조지아 주의 사반나 시에 내리다.

1737. 12.  2.     쏘피아 합키(Sophia Hopkey)사건의 악화로 귀국길에 오르다

1738.   2.  1.     영국 딜(Deal)에 도착

             5. 24.    존 웨슬리의 회심 체험(evangelical experience)

             6. 23.    독일의 허른허트(Herrnhut)의 모라비안 교도들을 방문

1739.    5.  2.    브리스톨(Bristol)에서 최초로 옥외설교를 하다.

            11. 20.   화운더리(Foundery)에서 설교를 하다.

1740.    7. 20.   훼터 레인(Fetter Lane)의 무리들과 결별하다.

1742.    5. 28.   뉴캐슬(Newcastle)을 최초로 방문하다.

1743.    5. 29.   런던의 웨스트 스트리트(West Street Chapel)채플을 열다.

              8. 26.   콘월(Cornwall) 집회를 시작하다.

            10. 20.   웬스베리(Wednesbury)에서 폭도들을 만나다.

1744.    6. 25.   최초의 연회(Conference)를 열다.

              8. 24.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설교를 하다: 최후의 설교가 되다.

1747.    8.  9.    아일랜드(Ireland)를 최초로 방문하다.

1751.   2. 18.    바자일레 부인(Mrs. Vazeille)과 결혼하다.

             4.          스코틀랜드(Scotland)를 최초로 방문하다.

             6.          링컨 대학 교수직을 사임하다.

1753.  11. 26.   루이스햄(Lewisham)에서 자신의 묘비문(Epitaph)을 쓰다.

1755.  1.           신약성서주해(Notes Upon the New Testament)를 출판하다.

            5, 6-8.   영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리즈(Leeds)에서 논의하다.

1764.  1. 12.     도킹(Dorking)을 최초로 방문하다.

            4. 19.     복음주의적 성직자들에게 서신을 보내다.

1766.  1. 31.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평이한 해설을 출판하다.

1768.  4. 27.     유언(will)을 쓰다.

            8. 24.     트레베카(Trevecca) 대학을 설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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