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호세아를 닮은 성자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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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4 10:44 조회1,538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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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호세아를 닮은 성자를 찾아서
동광원 화순 분원에서 하루를 쉰 우리 일행은 다음 날 아침 한영우 집사의 인도로 등광리 마을을 찾아갔다. 한영우 집사는 이현필 선생의 제자로 광주와 함평에서 거지들을 데리고 살았고, 서울에서 넝마주이를 하면서 수도생활을 한 적도 있었다. 지금은 이곳 화순 도암에서 동광원 수녀들의 농사짓는 일을 돕고 있다. 우리들의 순례행진에 동광원 화순 분원 김춘일 원장이 함께 하면서 좋은 말벗이 되어주었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는 조용한 산골 마을이다. 등광리는 원래 등잔걸이처럼 생겼다 하여 등광리(燈光里)라 하였으나 후에 등광리(登光里)라 하였다고 한다. 남평이나 영산포에서도 40리나 산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 산속에 마치 서울의 도봉산처럼 하늘 높이 솟은 아름다운 봉우리가 있다. 마을 앞에서 바라보면 오른 쪽에 뾰족하게 우뚝 솟은 497m나 되는 기묘한 바위, 괴상한 돌 그리고 비자나무 숲이 장관을 이루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산이 있다. 이 산이 바로 천태산이다. 춘양 쪽에서는 이 산을 개천산이라고 부른다.
이 마을 어귀에서 조금 들어가면 이세종 선생이 살던 집이 있다. 슬레이트 지붕을 올린 낡고 작은 집이다. 담도 없고 별채도 없는 세 칸짜리 흙담집이다. 사람도 살지 않고 여기 저기 흙이 떨어져 나가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이세종 선생이 도를 깨닫기 전에 여기서 살았고 그의 부인 ‘한골 어머니’ 문순희 여사가 3년 시묘를 치른 뒤 산에서 내려와 30년 동안 살던 집이다. 여기가 바로 이세종 부부가 밤만 되면 예외 없이 베개를 들고 마루를 건너 방을 옮겨 다니며 숨바꼭질하던 역사적인 현장이다. 그때 일을 상상해 보면 웃음이 저절로 나오기도 했고 그 거룩한 숨바꼭질이 존경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세종ㆍ이현필 유적지
전남 화순 도암 일대에 있으며 이 지도는 이덕주 교수의
“한국 기독교 문화 유적지를 찾아서”에서 가려 뽑은 것이다
이세종은 1880년 무등산 자락이 길게 늘어진 전남 화순군 도암면 등광리 천태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렸을 때 이름은 영찬이었다. 가난하고 일자무식이었던 그는 10년 동안 머슴살이 끝에 마을에서 제일가는 부자가 되었다. 100여 마지기나 되는 논을 가진 큰 지주가 되었다. 그러던 그가 글을 배울 겸 성경을 얻어 읽다가 예수를 믿고 크게 변화를 받게 되었다. 그의 변화는 참으로 철저했다. 어렸을 적에 남의 밭에서 오이 하나 따 먹은 것까지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모두 갚아 주었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요, 내 것이라곤 하나도 있을 수 없다고 깨달은 그는 빚진 자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에게서 담보로 잡았던 집과 땅 문서들을 모두 불살라버렸다. 그들의 채무를 탕감해 준 것이었다. 그리고 창고 문을 열어 쌓아 두었던 양식과 재물을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고루 나눠 주었다. 자기 피 땀으로 마련한 땅들을 구제에 써 달라고 면사무소에 몽땅 바쳐 버렸다.
천태산 자락에서 설명하는 한영우 집사(왼쪽에서 두 번째)
안내하던 한영우 집사가 그 후의 이야기를 이렇게 들려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이 이공(이세종)의 선행을 기리는 송덕비를 길가에 세워 주었대요. 이 소문을 들은 이공은 자기가 한일은 비를 세울 일도 못되고 자기의 이름은 세상에 나타낼 만한 것도 못되니 제발 그 비석을 없애 달라고 사정하였지요. 여러 번 눈물로 사정하는 그의 진심을 알고는 할 수 없이 그 비석을 땅 속에 파묻어 버렸는데 지금도 파묻은 자리가 어딘지 모르고 있대요.”
이세종이 누구인가? 그는 철저한 자기 부정, 자기 비움, 자기 버림의 사람이었다. 우린 이세종을 통해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살다 간 비천한 예수, 청빈한 예수, 겸손한 예수를 본다. 나라는 이름, 나라는 의식, 나라는 생각조차 없애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려 했던 그의 모습 속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피어나고 있다. 사실 묻어버려야 할 것은 바로 나, 요 나인 것이리라.
한벼리, 곧 큰 바위 벼랑으로 되어 있어
하늘 천(天)자와 별 태(台)자를 각각 취하여 이름 붙인 천태산
천태산은 이세종에게 깊은 영감을 준 영산이었다. 이 천태산 자락에는 이세종이 즐겨 걸어 다니던 오솔길이 있다. 이 오솔길을 홀로 걸으면서 이세종의 영성은 깊어지기 시작하였다. 우리 일행은 맨발로 이 호젓한 길을 걸어 보았다. 흙과 돌을 밟으며 노래하며 가는 길이란 도시 콘크리트 문화에서는 전혀 느껴볼 수 없던 아름다운 산보 자체였다. 이세종은 이 오솔길을 걸으며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이세종이 거닐던 천태산 오솔길 어귀에서
천태산 기슭, 마을이 내려다보이는 오솔길을 천천히 걷고 있는 이세종은 울고 있었다. “하나님, 이 죄인들을 어떻게 하실라우?” 그의 마음 속엔 자비심이 강물처럼 넘쳤다. 걸음마다 눈물이었다. 이탈리아의 성자 프란치스코가 언제나 울며 거리를 지나갔듯이 이세종도 자비가 충만하여 걸음마다 눈물을 흘리면서 남의 영혼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이세종은 예수 믿다가 타락한 이를 생각하고는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누구의 집을 방문할 때는 대문 밖에서 잠깐 발을 멈춰 서서 자기 마음을 반성해 보고 자기 속에 사랑이 없으면 그 집에 들어가지 않고 되돌아갔다. 그는 추운 겨울에도 이불을 가슴 위로 덮고 자지 않았다. 이 추운 밤에도 남의 집 처마 아래서 웅크리고 밤을 지새울 사람을 생각해서였다. 그는 밥을 먹을 때도 땅바닥에 차려놓고 먹었다.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는데 걸인들에게 일일이 상을 차려줄 수가 없어서 자기도 땅에서 밥을 먹는다는 것이다. 그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위해서 차마 먹을 것을 입에 넣지 못했다. 남이 죄를 짓는 것만 보고도 울었고, 남이 불행을 당하면 달려가서 함께 울었다.
“만물들아! 다함께 하나님을 찬양하세!” 아름다운 산천과 우거진 숲을 바라볼 때면 이세종은 한량없이 기뻤다. 그는 성 프란치스코에 대해서는 전혀 들어본 일이 없지만 프란치스코가 해와 달과 벌레들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노래했듯이 이세종도 황홀한 환희 속에서 그렇게 노래했다.
그는 모든 성인들이 그렇듯이 사람뿐만 아니라 산천초목과 금수, 곤충에 이르기까지 만물을 사랑했고, 생명을 지닌 모든 것들을 경외하고 넘치는 자비심으로 대했다. 그는 산길을 지나가면서도 사람들의 머리를 쓰다듬듯이 풀잎을 쓰다듬어 주면서 다녔다. 길에 뻗어 나온 칡넝쿨은 밟지 않고 옮겨 놓고 지나갔다. 누가 밞은 넝쿨을 들고는 탄식하며 넝쿨에서 흐르는 진액이 피 같다고 했다. 자기 발밑에 밟혀 죽어가는 개미를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이나 빈대도 죽이지 않았다. 파리도 문을 열고 밖으로 몰아내긴 했어도 죽이진 않았다. 자기 집 구정물 통에 쥐가 빠지면 나뭇가지를 꺾어 사다리를 놔 주어 쥐가 도망치게 해주었다. 부엌 구석에 독사가 있어도 때려잡지 않고 나뭇가지로 슬슬 몰아 밖으로 내쫓아 보내면서 “큰일 날 뻔했다.”고 중얼거렸다. 그는 사람의 먹을거리라고 해서 마음대로 살아 있는 동물과 식물에게 횡포를 가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생명은 대소, 고저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고, 그분께서 주관하시는 것이다.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온갖 생명에 대한 사랑, 여기에 이세종의 토착적 영성의 핵이 있다. 그는 한편으로 자신 속에 있는 감각적 욕망을 제어하며 살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연을 이루는 생명을 하나같이 제 몸 위하듯 존중했다.
이세종 부인과 이현필 부인의 쌍무덤
오른쪽이 이세종 부인 문순희의 무덤이고 왼쪽이 이현필 부인 황홍윤의 무덤으로
도암면 도장리에 있다
등광리를 지나 용하리를 거쳐 가면 도장리 마을이 나온다. 여기엔 이세종의 부인인 ‘한골 어머니’ 문순희 여사와 이현필의 부인인 황홍윤 여사의 무덤이 있다. 이 무덤들은 한영우 집사에 의해 관리되고 있고 지금은 두 분의 무덤 앞에 조그마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당시 문순희 여사의 죽음을 들은 유영모 선생은 다음과 같이 그의 일지에 기록하고 있다. “1971년 2월 11일 이세종님의 마나님 돌아가시다는 말씀 듣다. 듣건대 거듭거듭 많이도 거듭 살아서 돌아가시었다고나 느껴진다”(다석 일지, 1971. 3. 29.) 도장리 고멜의 무덤에 가보면 가슴 열리는 사랑의 이야기를 듣고선 눈물 흘리고 돌아오게 된다. 이 두 여인들은 성자 남편을 둔 이유로 악처 역할을 해야 했다.
이세종은 30세 때 14살짜리 시골 처녀를 아내로 맞았다. 이세종의 부인 문순희는 무식하고 생각이 좁고 답답한 여자였다. 예수 믿고는 순결생활에 대한 깨달음이 커서 아내와 이혼은 하지 않으면서도 한방에 거처하는 것을 거부하고 남매처럼 지냈다. 그렇게 하는 길이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였다. 밤에 아내가 남편 방에 기어들어오면 내쫓았다. 건강하고 무식한 아내는 참다 못해 본 남편을 버리고 딴 남자에게 두 번이나 시집을 갔다. 그럴 때면 이세종은 아내가 쓰던 세간을 사람을 시켜 지게에 옮겨다 주었다. 그러고는 아내에게는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말라고, 아무 때든지 회개하고서 돌아오라고 간곡히 타일러 주었다. 그러고는 때때로 아내 집에 심방을 갔다. 어떤 때는 아내의 새 남편 전처의 어린애들에게 주려고 사탕을 사 가지고 찾아갔다. 아내는 이세종에게 찾아오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했지만, 그래도 또 찾아가면 아내는 구정물을 바가지로 떠서 이세종에게 물벼락을 뒤집어 씌우면서 “오지 말라는데 왜 자꾸 오느냐.”고 대들었다. 이세종은 구정물 세례를 받으면서도 부인을 향해 “예,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마시오. 하나님을 꼭 잊어버리지 마시오. 살다 살다 못 살겠으면 또 나를 찾아오시오!” 하고 간곡히 권면하였다.
이세종은 참으로 호세아를 닮은 사랑의 성자였다. 그는 초목을 사랑하고 짐승들과 벌레도 사랑하고 개미와 지렁이, 그리고 지네와 독사까지 사랑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며 이제 창녀같이 여러 남자를 따라가는 음탕한 아내까지 사랑했다. 사랑의 선지자 호세아가 음녀로 타락한 아내 고멜을 찾아가 타이르듯이 이세종도 능주로 시집간 아내의 집을 또 찾아 다녔다. 이세종은 참으로 한국판 호세아였다. 부인 문순희는 그 후부터는 마음을 고치고 남편의 감화로 변해 갔다. 말년에 이세종이 세상을 버리고 깊은 산 속에 숨어 살 때에도 부인은 끝까지 떠나지 않고 따라다녔고, 그녀도 남편처럼 거지꼴로 살았다. 그녀는 이세종이 세상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에 묘를 쓰고 남편의 무덤을 삼 년 동안이나 지키면서 혼자 살았다.
다시 돌아온 그녀의 말년은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고독했으나 꾸준히 지난 날을 참회하면서 이세종의 가르침대로 살았다. “나는 세상에 와서 그렇게 잘 믿는 남편을 만난 행복자이다.”하면서 감사했다. “내가 예수를 안 믿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하면서 자기 같은 여자가 좋은 남편 만난 덕에 예수 믿고 구원 얻은 것을 감사했다. 이세종이 세상 떠난 뒤에도 부인은 수십 년 더 살면서 77세에 임종할 때까지 남의 폐를 끼치지 않고 혼자서 손수 농사를 지으며 살아갔다.
이세종의 길은 사랑의 길이었다. 그의 신비적 사랑은 끝없이 열려진 사랑, 무차별의 사랑으로 나타났다. 그의 무차별의 사랑의 무제약성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나타나 고멜과 같은 아내를 완전히 변화시키고 만 것이다.
이현필 선생의 부인도 ‘한골 어머니’에 뒤질 것이 없었다. 광주 백영흠 목사의 처제인 그녀는 결혼 직후부터 도를 깨달은 남편이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고, 거지와 고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집안 살림을 멀리하자 한 때는 칼을 품속에 가지고 다니며 살해할 기회를 노릴 정도로 남편을 미워하였다고 한다. 그녀는 너 죽고 나 죽고 해보자고 독약과 칼을 품고 남편을 쫓아 다녔다. 그녀는 결국 다른 데로 시집가 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늘그막에 병이 들어 도장리로 들어와 정월례 자매의 집에서 3년 동안 기도하며 살다가 1998년 83세로 세상을 떠나 ‘한골 어머니’ 옆에 묻혔다. 말년에 그녀는 옛 남편에 대한 그리움과 뉘우침 속에 이현필 선생이 남긴 빛 속에 성화되어 갔다. 그녀는 사람들을 만나면 “예수 믿겠으면 이현필처럼 믿으라.”고 권하였다. 그녀는 날마다 창문을 열고 멀리 보이는 문순희 여사의 무덤을 바라보며 “당신이 부럽소. 당신이 부럽소.”, “그때 내가 눈꼽만치라도 이성이 있어 깨달았더라면 오늘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을…”하고 참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황홍윤의 시신도 앞산 문순희 여사의 무덤 곁에 가지런히 누웠다. 살던 집에서 걸어서 20분 거리, 나뭇꾼이 다니는 오솔길 가이다. 생전에는 남편을 이해하지 못했으나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 뉘우치고 남편들이 남긴 빛 속에 참회와 성화되어 가는 삶을 살다가 간 두 여인의 무덤이 낮은 산 솔밭 사이에 찾는 이도 없이 나란히 쏠쏠히 잠들어 있었다.
이들 두 어머니를 모시며 병을 시중들었던 도장리 마을의 정월순ㆍ정월례 자매는 이세종이나 이현필 선생을 만나본 일이 없었으나 건너 마을 동두산 교회 송동근으로부터 이세종 선생 이야기를 듣고는 ‘이공님의 예수’를 믿기 시작한 것이다. 이들 자매는 제자의 도리로 두 어머니 병시중을 들었던 것이다. 필자가 정월순 자매에게 어느 교회 나가느냐고 물었더니 “우린 이공님 예수를 믿지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은 교회 나가지 않는 교인들이었다. 이곳 도암에서만 볼 수 있는 희한한 모습이었다.
민중 신학자 안병무 박사는 이세종에 대한 회고담을 이렇게 쓰고 있다. “이공의 영상이 가끔 겹친다. 그는 언제나 불을 때지 않은 방 안에서 누더기 이불을 반쯤만 가리고 잤으며 보리밥만 먹었다고 한다. 집 없이 추위에 떨면서 주리는 사람들을 생각해서였단다. 이공은 단순히 이상주의자만은 아니었다. 그는 사회개혁에 몸을 내던지지는 않았지만 종말에는 자기 재산을 송두리째 내어 놓았었다.”
이세종의 음식이나 행색은 거지나 다름이 없었다. 지나치게 검소했다. 잘 입으려 하지 않고, 조금이라도 사치스럽고 좋은 듯 싶은 것은 저주스러워 못 쓴다고 하면서 헌 누더기로 만족하였다. 그는 평생 누더기 옷을 걸치고 살았다. 그는 남이 보는 데서 음식을 먹지 않았는데 쑥에다 밀가루를 섞어 밀가루 범벅을 만들어 먹었다. 그는 기도 중에 “도인은 화려해선 못 쓴다.”는 영음을 세 번이나 들었다고 한다.
이세종은 거지 옷에다가 머리에 맥고모자를 쓰고 다녔는데 그 모자는 너무 오래 되어서 퇴색하고 다 떨어져 볼품없는 것이었다. 이세종과 친한 어느 장로가 보다 못해 그가 없는 사이에 그 모자를 아궁이에 던져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새 모자를 대신 걸어 놓았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이세종은 그 장로와 절교하고 그 동안 그에게서 신세진 것을 돈으로 계산해 갚고 관계를 끊어 버렸다.
문순희, 황홍윤 여사가 세상 떠나기까지 살던 집
도암면 도장리에 있으며 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들을 모시며
병시중을 든 정월순 자매다
이세종의 길은 청빈의 길이었다. 청빈은 주어진 가난이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맑은 가난을 말한다. 주어진 가난은 우리가 극복해야 할 과제지만 청빈은 절제된 아름다움이며 삶의 미덕이다. 풍요 속에서는 사람이 타락하기 쉽다. 그러나 맑은 가난은 우리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주고 올바른 정신을 지니게 한다. 이세종은 청빈의 길을 걷기 위해 단순하고 간소하게 살아갔다. 불필요한 것들은 다 덜어내고 꼭 있어야 할 것들만 붙잡았다. 단순과 간소는 텅 빈 공의 세계이다. 텅 빈 충만의 경지이다. 텅 비워야 그 안에서 메아리가 울린다. 텅 비워야 거기 새로운 것이 들어찬다. 모든 것을 포기할 때 진정으로 거기서 영혼의 메아리가 울린다. 다 텅 비었을 때 채워지는 그 단순한 충만감,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가 아니겠는가?
등광리와 도장리 마을을 돌아보고 승합차에 오르는 순간 일행 중 한 사람이 소리쳤다. “잘 왔다! 잊혀진 거룩한 땅에.” 우린 정말 성인의 얼이 서려있는 이곳에 참 잘 온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을 밟고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으리라. 이젠 우리가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다 예수 뿐이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오직 예수 뿐이다
예수 사랑 그저 예수다
그 이름 부를 때마다 너무 달콤해서
입을 쭉쭉 빤 성 프란치스코처럼
우리도 그만치 예수를 사랑하자
예수를 너무 애타게 바라서 겨울에도 가슴 뜨거워
앞 가슴 열고 다닌 분도 라브르처럼
우리도 그만큼 예수를 사랑하자
세상에 그 누구보다도 예수를 가장 사랑하게 해 달라고
바라던 나머지 단 5분 예수 잊어버리고 회개한
소화 데레사처럼 우리도 그만한 정도로 예수를 사랑하자
미치자 크게 미치자 예수를 위해 미치는 것만이 나의 소원이라고
부르짖었던 시무언 이용도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수를 사랑하자
두 번씩이나 다른 남자에게 시집간 아내를
심방 가서 전도하더니 기어코 회개시킨 이세종처럼
우리도 그 정도로 예수를 사랑하자
지금 이 순간 내 가슴 속에 뚝뚝 떨어져 오는
님의 피를 받고자 그토록 사모했던 맨발의 성자 이현필처럼
우리도 그렇게 예수를 사랑하자
그대 가슴을 열라
지금 불타는 열망으로
님의 십자가 밑에 바싹 다가서라
눈물과 열망으로 님을 쳐다 보아라
아, 예수다
내 사랑하는 예수다
그저 예수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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