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기독교 유적지 순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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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6-10-13 11:41 조회3,733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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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 기독교 유적지 순례
글쓴이: 최 흥 욱 목사
(서부동산교회 담임)
소록도에 가면
고흥반도 남쪽 끝
녹동항에서 500m 떨어져 있는
소록도에 가면
천사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팔 다리 문드러지고
피 고름 진물 흘러나오는 몸을 가지고
오히려 기쁨으로 찬송하고
나라와 민족의 통일을 위해 기도하고
자신들보다
다른 사람들의 평안을 비는
그들의 모습은 분명 천사의 얼굴이었다
앞을 볼 수 없어서
서너명씩 줄지어
대나무 지팡이를 붙잡고
더듬더듬 성전을 찾아 나와 예배하고
새벽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일흔이 넘는 늙은이들이
동강난 두 손목으로 하모니카를 받쳐들고
일그러진 끔찍한 얼굴로
아름다운 찬송가를 불어대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이미 땅에 속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일그러진 모습
움직일 수 없는 몸
눈이 없는 휑한 구멍
썩어가는 몸
비록 육체는 이렇게 섬뜩한 모습이지만
그들의 마음은 주님을 닮은
아름다운 천사의 모습이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그리움으로 살고 있는
아기 사슴 마을 소록도에 가면
하늘에 속한 사람들을 만나고 돌아오니
행복하기만 하다
소록도의 두 천사
어린 사슴의 모습을 닮았다고 붙여진 고흥반도 남쪽 끝 소록도에 가면 40년 동안 한센병 환자들과 울고 웃으며 함께 살아온 두 천사가 있습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수녀인 마리안느(68세)와 마가레트(67세)입니다.
두 얼굴 없는 외국인 수녀는 모두 가기를 꺼리는 곳 그곳에 가서 기쁨으로 나환자들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너무도 단순합니다. 텔레비전도 없는 조그만 방에서 수십 년이 넘음직한 사과 궤짝 크기의 장롱이 유일한 가구이고 하심(下心)이라고 쓰여져 있는 침대 한 개로 생활하고 있고 매달 정부에서 주는 자원봉사료 10만원이 그들의 총 재산입니다.
칠순 앞둔 나이에 그들은 날마다 아침 5시면 일어나 환자들을 돌보고 생활비를 줄이느라고 속옷도 직접 꿰매 입습니다. 여러 언론사의 기자들이 그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기자들이 온다는 말만 들으면 그들은 멀리 숨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좋아서 하는 일인데 그게 세상에 알려져 아름다운 이야기 거리가 될 아무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소록도의 두 천사들, 그들은 분명 매스컴도 피하고 사진 찍기도 꺼려하는 숨어서 사는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의 사랑을 심는 성자였습니다. 모두가 드러내기를 원하고 인정받기 원하는 세상에서 이런 숨은 성자와 같은 그리스도인들을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 행복입니다.
“오, 주여, 숨어서 향기를 피우게 하소서.”
동도섬의 세 무덤
전라도 여수 율촌에 자리잡은
사랑의 동산 애양원에 가면
동쪽 끝에 동도라는 섬이 있다
세면이 바다로 둘러 쌓인 조용한 동산
아침 저녁 갈매기의 울음이 서러워
목이 메이는 외로운 반도
때때로 파도 소리가
슬픈 이야기를 끌고 오고
쓸쓸한 애양원 사람들이 고향이 그리우면
갯바람 맞으며 갯내음 맡으며
목 놓아 울다가는 그런 섬 같은 곳이다
소금 냄새 짜게 풍겨오는 동도
팡파지름한 가운데
순교 가족 삼부자의 무덤이 전설처럼 고요히 잠들고 있다
모두 세 개의 무덤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데
앞의 두 개는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 동신의 것이고
뒤에는 손양원 목사님과 사모님이
함께 묻혀 있다
경상도 함안 시골에서
가난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나서
한평생을 나환자들의 친구로
옥중 성도로 사랑의 사도로
순교의 제물로 바쳐진 손양원 목사님
병으로 썩어 문드러진 얼굴에서
주님의 모습을 발견하고
오그라진 손가락에서
영생을 만져보며
썩어내리는 살을 보면서
하늘나라를 찾던
꿈에도 잊지 못할 참된 구도자 손양원 목사님
모리아산 꼭대기에 선 아브라함 처럼
바로 이 자리에서 두 아들을 순교의 제물로
기쁘게 바치면서 무려 아홉 가지나
감사의 제목을 드려 하나님께 감사드린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
그러던 그가
애양원 동산인 동도
곧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이 묻힌
무덤 곁에 묻히게 되었으니
이제 거기에는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무덤 세 개가
나란히 마련된 셈
그것도 살아 다 썩어 문드러져 가는
나환자들의 손에 의해 묻혔으니
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아, 행복하여라
동도섬의 세 무덤이여
세 번 놀라는 사람
얼마 전에 여수 애양원에 다녀왔습니다. 그리도 가보고 싶은 곳이어서 그런지 발걸음 닿는 곳마다 깊은 영감이 내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을 만나면 세 번 놀란다고 합니다. 첫째는 너무도 유명한 분이기에 사람들이 멋있는 풍채와 건장한 몸집을 가진 이로 생각하지만 그의 작고 초라한 모습에 놀라고, 둘째는 그 조그마한 몸에서 나오는 우렁찬 목소리에 놀라며, 셋째는 그의 입을 통해서 쏟아져 나오는 진리의 말씀에 놀란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손양원 목사님을 삼경 목사님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의 살아온 이야기와 순교신앙을 엿볼 수 있는 순교기념관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내 가슴 한편에서 이런 물음이 왔습니다. “무엇이 세상을 놀라게 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 대해 난 이렇게 대답하면서 자랑스럽게 이곳을 나올 수 있었습니다. “소유는 적으나 존재는 넉넉하게 살자. 좀 가난하게 살자. 우리는 좀 가난하면서 알차게 살자. 겉으로 번질하며 안으로 텅 빈 것보다 겉으로 가난하며 안으로 뜨거운 가득참으로 살자.” “오, 주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이고 싶습니다.”
안식원에서 풍기는 향기
전주시 완주군 비봉면에 자리 잡은
서문교회 교우들이 묻혀있는 안식원에선
네 철 어느 때나 향기가 풍기고 있다
그곳에 가면 거리의 성자 가난한 이웃의 천사라고
불리우던 지금은 깊이 잠들어 있는
방애인 선생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나
개성 호수돈 여학교를 마치고
전주 기전여학교 교사로 온 뒤
서문밖교회에 나가면서
전주여자 기독청년회를 만들고
전주고아원을 세워
걸인과 고아들
가난하고 병들고 어려운 이웃을 돌보다가
2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한국교회의 성녀 방애인 선생
길 가다가 헐벗은 사람 보면
자기 저고리 바꿔 입혀주고
추운 겨울 날 떨고 있는 거지 아이를 보면
업어서 자기 방에 데려다 기르고
거지 아이 수가 하나 둘 불어나자
고아원 운동을 시작했던 사랑의 천사
여학교 선생이지만 날마다 길에 나가 전도하고
전주 시내 집집마다 고아원 기금 모으러 다니고
옷은 한 벌만 가지고 살아가고
주위에서 그녀에게 결혼하라고 하면
“결혼해서 뭘해요. 난 주님께 바쳤어요.”하며
끝까지 처녀성을 지키며
영혼구원과 가난한 사람들 위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바치고 간
순결한 성녀 방애인 선생
그가 간지 70년이 지났는데도
그에게선 향기가 나고 있는 것이다.
영혼을 구원하는 교사
얼마 전에 전주에 내려가서 기독교 유적지를 둘러보고 왔습니다. 이곳 전주에서의 온통 나의 관심은 방애인 선생과 관계있는 곳이어서 그가 교사로 있던 기전여학교, 그가 늘 전도하는 다가천, 그가 지금 잠들어 있는 서문교회 안식원(묘지)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거리의 성자라고 불리우는 방애인 선생은 빠짐없이 오후수업을 끝내고는 빈민들이 모여살고 있는 다가천변으로 갔습니다. 냇가의 양지 바른 곳에 옹기종기 모여 옷조차 변변히 입지 못한 어린이들을 부러 모았습니다. 아이들이 모이면 찬송과 기도를 가르치면서 성경말씀을 이야기한 뒤 그들에게 싸가지고 온 누룽지를 나눠주었습니다. 이들은 방애인을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대했습니다. 방애인은 학생들이나 선생들이 입지 않는 떨어진 헌옷을 거둬 이것을 깨끗이 빨고 말려서 밤을 새워가면서 누더기를 깁고, 기운 옷가지를 들고 다니면서 한 가지씩 나눠주면서 “예수 믿으세요. 예수 믿으면 소망이 넘치고 웃음이 깃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하고 전도하였습니다.
방애인의 가슴 속에는 영혼구원의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시간은 모자라고 몸은 하나이니 그는 울부짖으며 영혼구원을 위해 하나님께 매달렸습니다. 방애인 선생! 그는 학생들에게는 어진 선생님이요, 다가천변의 불쌍한 아이들에게는 따뜻한 어머니가 되어주었고, 젊은이들에게는 형제가 되었으며, 가정불화 만난 이에게는 좋은 중재인이었고, 길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는 선한 목자였습니다.
전주 다가천 다리 밑에 앉아있는 노숙인 형제들과 노인 어른들을 보면서 방애인 선생이 전도하는 모습이 떠올라서 나도 한창 그곳에 서 있다가 그곳을 떠났습니다.
“오, 주여, 제2, 제3의 방애인을 이 땅에 주소서. 아멘.”
(1930년대 서문교회 부근)
무등산 자락의 성자
전라도 광주에서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성자로 부르기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곧 최흥종 목사님이다. 전라도 광주 출신 최초 교인, 최초 장로, 최초 목사 칭호를 받은 최흥종은 젊은 시절 깡패 소리를 들을 정도로 난봉꾼이었다. 1904년 겨울에 친구 최재일과 함께 벨(E. Bell) 선교사 집에 들락거리다 광주의 첫 교인이 되었다.
1909년 4월 광주 선교사 오웬(C. C. Owen)이 지방 전도를 나갔다가 폐렴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었다. 목포에 있던 의료선교사 포사이드(W. H. Forsythe)가 이 소식을 듣고 영산강을 거슬러 배를 타고 올라왔다. 그때 최흥종이 그를 맞으러 나주 영산포 나루까지 나갔다. 영산포에 내린 포사이드는 말을 타고 광주로 들어오던 중 한센병에 걸려 집에서 쫓겨난 지 10년 넘은 여자 걸인을 만났다. 포사이드는 자기가 탔던 말에 환자를 태우고 자신은 걸어서 광주까지 갔다. 광주에 도착한 포사이드는 피고름이 엉겨 붙어 있어 얼굴의 형체도 알 수 없이 문드러진 그 보기 끔찍한 나환자 여인을 두 손으로 안아 내렸다. 바로 이때 나환자의 지팡이가 굴러 떨어졌다. 여인을 두 손으로 안은 포사이드가 옆에 서 있던 최흥종에게 소리쳤다. “미스터 최! 저 지팡이 좀 집어 주시오. 어서” 최흥종은 한참 망설였다. 포사이드의 재촉에도 불구하고 그날 지팡이를 잡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고민에 빠졌다. “서양 선교사는 타향만리 남의 나라에 와서 까지 나환자를 자기 자식처럼 만지는데 난 왜 지팡이도 잡지 못하는가? 꽤 용감하다는 나도 못하는 일을 하는 저 사람의 용기는 어디서 나왔는가?” “그래 저것이 예수교의 힘이다. 예수를 믿으려면 저 의사처럼 믿어야 한다.” 세례 받았으나 껍데기 교인 수준이었던 최흥종은 진짜배기 교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버지가 남겨준 재산 중 봉선리 땅 1천여 평을 기증해 나환자 수용소를 세우고 그곳에서 나환자들을 돌보았다. 처음엔 40여명이던 환자들이 1928년에는 500여명으로 늘어났다. 피고름 묻은 지팡이 잡기를 꺼려하던 손이 그들의 환부와 마음 속에 흐르는 피고름까지 닦아주는 손으로 변한 것이다. 나환자 여인의 피고름 묻은 지팡이는 이후 가난하고 병들고 상처받은 이들의 몸과 영혼을 달래주는 성자의 지팡이가 되었다. 그는 나환자와 고아 그리고 걸인들의 영원한 친구와 아버지가 되었다.
최흥종은 오방(五放)이란 호를 사용했는데 가사로부터 방만(放漫), 사회로부터 방일(放逸), 경제로부터 방종(放從), 정치로부터 방기(放棄), 종교로부터 방랑(放浪)한다는 뜻이다. 곧 혈육의 정에 얽매이지 앟고, 사회적으로 구속받지 않으며, 경제적으로 속박 받지 않고, 정치적으로 자기를 앞세우지 않으며, 종파를 초월하여 정한 곳이 없이 자유를 누린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이다. 그는 영원한 자유인의 삶을 살았다. 집을 나온 그는 ‘유산각’이라 하여, 한 평 정도 되는 널빤지에 다리를 붙이고 사방을 문짝으로 막고 지붕을 덮은 수레를 만들어 끌고 다니며 거지들과 함께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최흥종은 버림받아 마지막 삶을 사는 삶들과 함께 지내다가 ‘이제 살만큼 살았다’고 생각하고 1966년 2월 10일부터 단식에 들었다. 이미 앙상한 뼈만 남은 그의 방에는 책상을 대신한 사과 궤짝과 찌그러진 물 주전자, 양은 밥그릇뿐 그밖에 이불이나 여벌의 옷가지도 하나 없이 살고 있었다. 제자들의 애원으로 광주 시내 아들집으로 옮긴 뒤 단식 95일 만인 1966년 5월 14일 세상을 떠났다. 광주 사회장으로 치러진 그의 장례식에는 광주 인근 걸인, 무등산에서 내려온 결핵환자, 여수와 나주에서 올라온 한센병 환자 수백 명이 몰려와 “아버지,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갑니까?”하며 통곡하였다.
주먹 출신에서 성자의 길로, 그리도 가난했던 시절 나눔을 실천한 가난하고 병든 자들의 아버지 오방 최흥종 목사님! 사람으로서 가질 수 있는 모든 것을 버린 오방은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학대받는 사람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그들의 아픔을 덮어준 버림받은 사람들의 아버지였으며, 가난의 굴레를 쓰고 살아가는 거렁뱅이와 저주받은 인생을 체념하고 살아가는 나환자들을 위해 몸 전체로 사랑을 나눈 우리시대의 작은 예수였다. 왜 광주 사람들이 그를 그렇게 지금도 그리워하고 있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당신은 무등산 자락의 성자 최흥종 목사님을 아십니까?
나환자의 영원한 아버지
영원한 자유인 오방 최흥종 목사님의 생애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사건은 1932년 봄의 구라행진이었습니다. 시인 신경림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최흥종은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나환자에 대한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청했으나 당국의 냉대로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광주로 내려가 나환자들을 모아 그들을 데리고 대행진하여 총독부로 쳐들어갔습니다. 출발은 150여명이었으나 가는 도중에 늘어 서울에 도착했을 때는 400여명으로 불었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열흘이 걸리는데 몸이 불편한 나환자들을 데리고 절뚝거리며 700리 길을 걸어갔으니 얼마나 고통스럽고 고달팠겠습니까? 사람들은 두려워 숨거나 몽둥이를 들고 마을에 들어오는 것을 아예 막았을 것입니다. 산비탈이나 공동묘지에서 잠을 자며 칡뿌리, 솔잎 등을 먹으며 그들은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을 동네에서 보이지 않는 먼 곳에 숨겨 놓고 최흥종 혼자 동네에 들어가 구걸하였습니다. 절뚝거리는 나환자들을 부축하기도 하고 업기도 하며 함께 걸어갔습니다. 바로 성자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마침내 총독부에 이르러 그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자 총독도 어쩔 수 없이 최흥종을 불러들여 요구사항을 들어줍니다. 그리고는 소록도에 있는 갱생원(자혜원)의 규모와 시설을 확대하여 떠돌며 걸식하는 나환자들을 전원 수용하고 치료하겠다고 약속하였습니다. 이래서 나환자들은 농성을 풀고 귀향하게 되는데 최흥종을 앞장세우고 그의 옷자락을 잡고 절뚝거리며 떠나 활기차게 돌아오는 그들의 당당한 행진은 그대로 한 폭의 성화였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장에서 그 자리에 참석한 200여명의 나환자를 대표하여 자활촌의 총무 최일담이 “아버지 어찌하여 우리만 남겨두고 가신단 말입니까? 아버지께서 영원히 가버리시면 누가 우리를 돌봐줍니까? 추운 겨울 누가 옷 입혀 주며 굶주릴 때 누가 밥을 먹여줍니까? 우리는 어찌 살라고 아버지만 영원히 가신단 말입니까?”라고 한 조사는 이 땅에 사는 모든 나환자들의 울부짖음이었을 것입니다.
“오, 주여, 이 땅에는 아직도 버림받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포사이드 선교사
전라도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목포로 광주로 군산으로 전주로 뛰어다니면서 일하다가 세상을 떠난 포사이드(Wylie H. Forsythe, 보위렴)는 평신도 의사로서 예수를 닮으려는 향기나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인들이 예수께 돌아오도록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 그는 전도하는 사람이었다. 길거리에서 만난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곤 했다. 한국 복음화를 위해 가장 전도지를 많이 뿌린 사람이었다. 100만명 구령운동은 그의 가장 큰 관심사였다.
포사이드는 사랑의 사람이었다. 그는 전주에서 길거리에 떨고 있는 아이를 데리고 와서 사재를 털어 고아원을 운영했다. 그는 오웬 의사를 구하기 위해 말을 타고 광주로 오다가 길거리에 쓰려져 신음하고 있는 나환자를 말에 태우고 자신은 마부가 되어 광주 기독병원으로 데리고 와서 양림동 너머 봉선리 마을 옹기 그릇 굽는 가마굴에서 나환자를 치료해 주었다. 이것이 한국 최초의 나병원인 광주 나병원의 시작이었고, 여수로 터를 옮긴 뒤 여수 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다. 그는 늘 병들고 고난당하고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한 작은 예수였다.
이런 포사이드의 삶은 한국인들 특히 호남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으로 남아 그를 뒤따라가게 하였다. 그가 여자 나환자를 부축하면서 병원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사랑을 발견했던 최흥종 목사는 일생동안 나환자를 위해 살도록 삶의 목표를 바꾸어 버렸고, 한국 영성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이현필 선생은 “포사이드를 배워야 합니다.”하고 말했으며, 소록도에서 나환자를 치료하며 살았던 한국의 슈바이처 신정식 박사의 책상에는 예수님, 포사이드 그리고 최흥종 목사의 사진이 평생 놓여 있었다고 한다.
이런 포사이드의 삶과 믿음은 호남지방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서 최흥종→배은희 강순명→이현필 정인세→김준호로 이어지는 계보를 이루었다. 이 계보는 앞으로 한국교회가 그대로 따라가야 할 믿음의 유산인 것이다.
(초기 애양원과 포사이드 선교사 및 기념비)
선한 사마리아 사람
광주 사람들이 “작은 예수”,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부르는 포사이드(보의사) 선교사가 있습니다. 어느 날 그는 광주에서 일하고 있는 친구 오웬 선교사가 열병에 걸려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향하였습니다. 남평 부근에서 나환자 여인이 길가에서 죽어가는 보았습니다. 그는 나귀에서 내려 그 나환자를 안아다 자기 나귀에 태우고 마치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나귀 고삐를 끌고 광주로 들어갔습니다.
광주 양림 마을에 있는 제중병원 앞까지 데리고 와서는 그 보기 끔찍한 나환자 여인을 두 손을 안아 내렸습니다. 바로 이때 나환자의 지팡이가 굴러 떨어졌습니다. 여인을 두 손으로 안은 포사이드는 마침 옆에 서 있던 최흥종에게 그 지팡이 좀 집어 달라고 하여습니다. 나환자의 피고름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나환자의 지팡이를 집어달라는 선교사의 부탁에 최흥종은 한참 망설였습니다. 그러나 곧 뉘우쳤습니다. “이 서양 선교사는 타향만리 남의 나라에 와서 까지 나환자를 가슴에 안고 살려주는 일을 하는데 난 왜 지팡이도 잡지 못하는가?” 여기서 최흥종은 큰 감동을 받고 포사이드 선교사의 의료사업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봉선리 땅 1천 평을 기증하였습니다. 봉선리에 작은 집을 짓고 나환자 20여명을 치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한국 최초 나병원인 광주 나병원의 시작이었고 1928년 여수로 터를 옮긴 뒤 1936년 여수 애양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내가 이 글을 쓰면서 서 있는 곳은 광주 양림동 기독병원 채플입니다. 포사이드 선교사와 최흥종 목사님의 향기가 짙게 풍기는 것 같아 좋습니다.
“오, 주여, 이 땅엔 선한 사마리아 사람들이 나타나야 합니다.”
(광주 기독병원)
카딩턴 선교사
광주 기독병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카딩턴(Herbert A. Codington) 선교사의 한국 이름은 ‘고허번’이다. 그는 일제에 의해 문을 닫았던 광주 기독병원을 1951년 다시 열었다. 카딩턴 선교사의 헌신적인 사역은 수많은 생명을 살렸고 결핵을 없애는 일에 크게 공을 세웠다. 그분의 사랑과 삶은 아직도 병원 곳곳에 살아 남아있다. 카딩턴은 제5대 광주 기독병원장 15년을 포함하여 24년 동안 광주 기독병원에서 일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 아들 한명이 7살에 한국 땅에서 죽어 양림동 선교동산에 잠들어 있는 아픔을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74년 굶주려 죽어가던 방글라데시로 떠났다. 그가 방글라데시에 있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국의 광주 커씨다. 사랑을 실천할 기회를 준 광주를 사랑한다. 그리고 지금은 방글라데시를 사랑한다.”
카딩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져 온다. 어느 날 간호사 한 사람이 숨을 헐떡이며 급하게 의사를 불렀다. 카딩턴이 급히 달려간 곳은 병원 안의 여자 화장실이었다. 한 폐결핵 환자가 대변을 보던 중 의식을 잃은 채 쓰러져 있다. 환자의 입 속에는 토해낸 음식물과 핏덩어리가 가득 했다. 핏덩어리는 점자 응고되어 굳어버리기에 그대로 두면 숨구멍이 막혀 죽을 수 있었다. 그래서 카딩턴은 처음에는 손으로 막혀있는 것들을 빼냈으나 잘 빠지지 않았다. 그러자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한국인 환자 앞에 무릎을 꿇고 환자의 입 속에 담긴 피 묻은 음식물을 입으로 빨아냈다. 이런 행동을 되풀이하자 환자는 깊은 숨을 토해내며 의식을 회복하였다.
의사 카딩턴, 그는 이 땅을 떠났지만 그가 광주 기독병원에서 베풀었던 사랑의 마음은 오늘도 광주 사람들의 마음 속에 깊이 뿌리 내려 이어지고 있다.
(1905년 광주 제중원)
아! 저분은 천사구나!
광주 기독병원의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카딩턴(고허빈) 선교사가 있습니다. 그는 광주 기독병원장으로 15년 동안 있으면서 결핵 환자를 위해서 사랑으로 봉사한 천사와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 당시 광주 기독병원 의사였던 김재창 장로님(과천교회)은 카딩턴의 모습을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어느 날 김 장로님이 광주 양림교회 새벽기도회에 났는데 카딩턴도 그곳에 있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카딩턴 앞에 변을 가득 실은 리어카가 나타났습니다. 중년의 허름한 옷을 입은 남성이 리어카를 끌고 힘들게 언덕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카딩턴은 왼손에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악취 풍기는 리어카를 밀었습니다. 카딩턴은 리어카 운전자와 계속 대화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교회에 나오십시오. 다음 주에 제가 당신을 초청하겠습니다.”
광주 기독병원 뒤편에는 카딩턴의 집이 있었습니다. 매우 큰집이었는데 카딩턴 가족은 방을 하나만 썼습니다. 다른 방에는 정신병자 결핵환자 가족, 치료받고 있는 창녀들이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카딩턴 부인이 널어놓은 옷들을 멋대로 입고 다녔습니다. 신발도 주인이 없었습니다. 아무나 먼저 신는 사람이 임자였습니다. “무척 힘드시지요? 사모님이 더욱 힘들어 보이는데요.” 김 장로님이 카딩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 감사하지요.”하고 카딩턴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자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 감사하지요.”하고 카딩턴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김재창 장로님은 “아! 저분은 천사구나!” 감탄하며 기쁨으로 환자를 치료하게 되었고 예수 믿는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다고 합니다.
“오, 주여, 사랑을 나르는 천사이고 싶습니다.”
(ㄱ자 형태의 양림교회와 성도)
서서평 간호사
광주의 전설적인 여선교사 서서평(Elisabeth J. Shepping, 쉐핑)은 1912년 한국에 와서 처음엔 서울 세브란스 병원 간호사로 일하다가 광주로 내려와 최흥종 목사를 만나 일생동안 그를 도우면서 주님을 위해 봉사했다. 그는 광주 제중병원(현 광주 기독병원)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하면서 많은 간호학 관계 서적을 출판하고 1923년 한국에서 처음으로 간호협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9년간 봉사하며 한국 간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는 원래 성경이 조급했기에 매사에 서서히(徐徐)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성을 서(徐)씨로 하고 이것을 또 강조하는 뜻에서 이름의 첫 자를 서(舒)자로, 두 번째 자는 모난 성경을 평평하게 한다는 뜻에서 평평할 평(平)자를 붙여서 서서평(徐舒平)이라고 하였다. 그는 또한 1922년에 전도부인 양성을 위한 이일학교를 설립하였고, 전국에서 처음으로 현재 광주제일교회인 금정교회에 오늘의 여전도회 전신인 부인 조력회를 만들었으며 기독교 여자 절제회 창설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특히 그 당시 가난하여 드릴 것 없는 교회 여성들에게 성미를 드리게 함으로써 오늘 교회 속에 성미 제도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구제 사업에도 남다른 열정을 보여 많은 고아와 나환자들을 자식처럼 데려다 길렀는데 이렇게 해서 얻은 양딸이 13명이었고 양아들도 여럿 있었다. 그는 생활비를 받으면 움막을 치고 있는 양림리 다리 밑으로 찾아가서 걸인들을 데리고 목욕탕에 가서 목욕시키고 옷도 새것으로 사 입힌 다음 음식점에 데리고 가서 고기로 잘 대접해 주었다. 특히 최흥종 목사가 세운 나환자 병원을 틈나는 대로 찾아 나환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치료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가 외로이 침상에서 임종을 맞이할 때는 담요 반 조각을 덮고 있었다. 주고 또 주고 모둔 것을 주다가 마지막에는 줄 것이 없었다. 불쌍한 나환자에게 줄 것이 없어 마지막 남은 담요 1장을 가위로 반절을 잘라서 그 환자에게 주고 말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여성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사랑이 많은 어머니였다.
결국 서서평은 1934년 54세의 나이로 양림동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유언은 “이젠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습니다. 먼저 가니 하늘나라에서 다시 만납시다. 할렐루아!”하고 오른팔을 치켜 올렸다가 내리고 웃으면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죽을 때 총 재산은 지갑 속의 7전과 집에는 밀가루 두 홉 밖에 남은 것이 없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광주 시민들이 일어나 그의 장례식을 맡았으니 이것이 광주에서 제일 처음 있었던 사회장이었다고 한다. 그의 상여 뒤에는 나환자 거지 그리고 평소 그가 학교를 세워 가르쳤던 많은 여전도사를 비롯해서 과부 여성 지도자들이 뒤를 따르게 되었다. 그녀의 장기는 유언대로 의학 실험용으로 기증되었고, 장례비용은 거의 한국인들이 부담했으며 걸인으로부터 은행가까지 수백 명이 그녀의 장례행렬 뒤를 따랐으며 무덤에는 수많은 꽃들이 바쳐졌다.
광주 제중병원의 간호사 선교사로 22년 동안 사회봉사 활동하다가 가난하고 병든 사람의 어머니로서 또 그늘진 곳을 밝혀주는 사랑의 사도로서 서서평은 숱한 일화를 남기고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그녀가 임종 시에 남긴 말이 우리들 가슴을 울리고 있다.
“하나님, 저는 성질이 급하여 많은 형제 자매들의 마음을 상하게 했습니다. 나는 잘 믿는 줄 알고 자만심이 강하여 하나님의 자녀를 함부로 정죄했습니다. 간호사로 있으면서 인내심이 없다고 책망하여 환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 일도 있습니다. 아버지! 긍휼을 베풀어주소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데 자랑이 없도록 주님의 피 공로로 이 죄인의 모든 죄를 사하여 주시옵소서····이젠 아무 것도 할 말이 없습니다. 먼저 가니 하늘나라에서 만납시다.”
(서서평과 세브란스 간호부 양성소 졸업생들)
내가 죽고 그분이 살아야 할텐데
서서평(쉐핑, Shepping) 간호사 선교사의 일대기를 쓴 백춘성 장로님은 「천국에서 만납시다」란 그의 책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한번은 어떤 신사가 광주 학동 강변을 지나는데 한 움막 속에서 울음소리가 흘러나왔습니다. 너무도 애틋하기에 발길을 멈추어 귀를 기울이고 섰다가 거적때기를 들치고 들여다보았습니다. 어둠 컴컴한 곳에 머리가 파뿌리처럼 하얀 늙은이가 혼자 앉아서 주먹으로 바닥을 치며 허리를 꾸부리면서 목메어 울고 있었습니다. 까닭을 물었더니 늙은이는 “서서평 부인이 세상을 떴다지 뭐요! 내가 죽고 그분이 살아야 할텐데.”하면서 퉁퉁 부은 눈과 콧물을 손등으로 문지르면서 울부짖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운다고 돌아가신 분이 살아납니까?” “눈물이라도 쏟아서 은혜 갚지 뭘로 갚겠어요.”
서서평. 그는 자기의 봉급과 소유물뿐만 아니라 그 자신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고 나환자들에게 주었고 한국 여성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가 외로이 침상에서 임종을 맞이할 때는 담요 반 조각을 덮고 있었습니다. 주고 또 주고 모든 것을 주다가 마지막에는 줄 것이 없었습니다. 불쌍한 나환자에게 줄 것이 없어 마지막 남은 담요 1장을 가위로 반을 잘라서 그 환자에게 주고 말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유산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남자 고무신을 신고 한복차림으로 한국 고아를 둘러 없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미국 처녀 서서평의 모습 속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 주님, 세상 떠날 때 나를 위해서 울어줄 사람이 있을까요?”
(서서평의 양림촌 묘소)
수피아의 어머니
수피아 여학교는 광주에 처음으로 세워진 일백년 동안 빛고을의 횃불을 밝힌 여성교육의 보금자리이다. 이 수피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가 있는데 그가 바로 수피아의 어머니라고 불리우는 유화례(F. E. Root) 선교사이다. 그는 1927년 34세에 선교사로서 수피아 여학교에 음악교사로 와서 1933년부터 수피아의 교장이 되었다.
그는 주일이 되면 학생들을 이끌고 가난한 농촌교회를 돌면서 전도도 하고 또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서는 친히 설교도 하였다. 수많은 농촌 교인들이 은혜를 받고 어른들뿐 아니라 어린이까지도 그를 기다렸다고 한다.
1937년 일제가 신사참배를 기독교 학교에까지 강요하자 “신사참배를 하더라도 학교는 유지하자.”는 일부 교사들의 인솔로 광주 신사에 참배하고 돌아오는 학생들을 못 들어오게 교문을 걸어 잠그고 수피아 문을 닫았다. 이 일로 무려 다섯 달 동안 연금과 구금상대토로 지내다가 1942년 6월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되어 미국으로 돌아갔다.
해방이 되자 그는 다시 광주로 돌아와 수피아 제8대 교장 일을 보게 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광주를 빠져나가 부산으로 일본으로 피난 갔으나 양떼를 버려두고 혼자 도망갈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지막까지 광주에 머무르면서 농촌교회를 돕고 나섰다. 그는 함께 선교사역을 하던 한국인 친구들인 조용택 정인세 이현필 선생(동광원 사람들) 등의 도움으로 풀지게 속에 숨어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 동굴로 피신하여 3개월 이상을 지냈다. 그러다가 광주가 수복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광주로 다시 돌아와 수피아의 제10대 교장 일을 보게 되었다.
1960년 수피아 교장 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광주에 남아 교도소 윤락여성 선교를 위해 자비량으로 봉사하였다.
1978년 그는 51년간 그의 모든 것을 바쳤던 광주를 떠나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제자들이 한국에 남기를 간청하였으나 “계속 한국에 남는 것은 한국인들에게 고통을 줄 뿐이다.”란 말을 남기고 미국으로 돌아가서 양로원에서 쉬다가 1995년 103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유화례 선교사.
그는 고아와 걸인들에게는 사랑스런 어머니였고,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이들에겐 인정스런 벗이었고, 갇히어 괴로워하는 이에게는 희망의 화해자였다. 민족 수난기에는 등을 밝혀 믿음의 식구들을 위로했고, 해방 후로는 산촌으로 섬으로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한결같이 수피아의 딸들을 가슴에 품고 다듬어 가꾸어 그들의 영혼을 일깨워 주었다.
강도 만난 우리 조국이 피와 불과 연기 속에서 죽어가고 있을 때 우리 위해 살다간 영원한 이웃.
오직 주님만 사랑하며 기다리며 바라보며 한평생을 살았던 아름답고 거룩한 동정녀 성녀. 고무신과 치마저고리를 즐겨 입던 가장 자랑스런 한국인 유화례 선교사. 그는 수피아의 어머니 광주의 어머니 전라도의 어머니 한국의 어머니 저 수많은 아들 딸들을 기르는 어머니였다.
무엇이 저리도 기쁠까?
1941년 봄 유화례(F. E. Root) 선교사는 여수 애양원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때는 애양원 교회 손양원 목사님이 구속되어 있었습니다. 유화례 선교사가 애양원에 내려가자 모든 환자들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습니다. 3개월 동안 애양원 식구가 되어 그들과 함께 웃고 울고 고통을 나누면서 지냈습니다.
유화례 선교사는 주일마다 애양원교회 예배를 인도하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나병 때문에 앞을 못 보는 환자인데 찬송가를 전부 외워버렸는지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과 똑같이 열심히 찬송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어떤 나환자는 입이 비뚤어지고 코가 찌그러졌으나 한마디 불평도 하지 않고 기도하고 찬송하였습니다. 진물이 질질 흐르는 사람이 예배시간에 참석해서 졸지 않고 경건하게 예배드리는 모습은 일반교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분위기였습니다.
나환자들은 유 선교사에게 손양원 목사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움직일 수도 없는 나환자들의 옷을 직접 갈아입혀주고, 소변 대변을 받아주고, 목욕까지 시켜준 손양원 목사님의 사랑의 이야기는 유화례 선교사의 가슴에 큰 감동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가 애양원교회에 와서 나환자들과 아픔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총이었고 참으로 유익한 일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수피아의 어머니 유화례와 사랑의 성자 손양원의 만남이었습니다.
“오, 주여, 하늘의 그 기쁨 내게도 주소서.”
(당시 애양원교회 예배하는 모습)
양림동 선교사 묘지
빛고을(광주)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운동장 왼쪽으로 계단이 있는 언덕을 오르면 선교사 묘지가 있다.
L자 형태로 되어 있는데 가운데 모서리 쪽으로 광주 선교사들이, 서족 날개 쪽으로 순천 선교사들이, 남쪽 날개 쪽으로 목포 선교사들이 묻혀있다. 모두 26기의 무덤이 여기에 비문과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빛고을 양림동 선교사 묘지는 서울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비하면 규모도 적지만 너무나 잊혀진 곳이다.
사연 많고 눈물겹기는 양림동 선교사 무덤들도 마찬가지다.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 결혼한지 1년 만에 죽은 신부, 풍토병에 죽은 사람, 물에 빠져 죽은 사람, 자식 보러 왔다가 주은 사람, 돌림병으로 하루 사이로 죽은 형제, 세달 살다 죽은 아이, 죽어서 태어난 아기 ····
어느 무덤 하나 아픔이 없는 것이 없다. 하나같이 고향 떠난 나그네들의 무덤이다. 거기에다 아픔이 담긴 죽음의 주인공들이다. 운전이 서툴러 교통사고를 내 죽은 아내를 이곳에 묻었던 벨(배유지)은 죽어서도 그 아내 곁에 누워 용서를 비는 것 같고, 형 따라 한국에 왔다가 죽은 크레인(구례인)은 어린 두 조카와 조카 외손주를 보듬어 안고 있는 듯 애처롭다.
“유달리 아이들 무덤에 마음이 아프네요.”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여그가 애장터라 혔다잖소? 애가 죽으면 갖다 버리는 곳 말이오.”
세월 따라 땅 주인 바뀌어도 땅에 심긴 갚은 한은 뽑힐 수 없는 것 같았다.
왜 이들이 조국을 떠나 여기까지 와서 고생하다가 죽어 갔을까? 영혼사랑 생명사랑 예수사랑 때문이다. 이들의 전도 희생 헌신으로 오늘의 광주와 호남지방의 교회들이 우뚝 서 있게 된 것이다. 빛고을 양림동에 잠들어 있는 선교사들은 죽어서도 말한다. “영혼사랑, 이게 인생 최대의 행복이다.”고. 영혼사랑 때문에 살았던 행복한 사람들. 그들에게선 향기가 난다.
빛고을의 향기
빛고을 광주 양림도 일대는 복음의 향기가 새록새록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양림동 일대는 광주의 예루살렘이라고 할만큼 많은 기독교 유적이 모여 있었습니다. 그곳은 광주 초기 선교지로서 기독교 문화의 보물 곳간이었습니다.
광주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양림교회, 그 교회 옆 낮은 담장 하나를 경계로 기독 간호대학 안에 있는 오웬기념관, 광주지역에서 처음 예배를 드린 벨 선교사의 사택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선교 기념비, 호남신학대학교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전남지역 선교를 위해 몸 바친 선교사들이 잠들어 있는 선교사 묘지, 광주에 첫발을 내디딘 배유지(벨), 우일선(윌슨), 오기원(오웬) 선교사의 사택과 기념관, 광주 최초의 미션학교인 수피아 여중고교, 현대식 의료방법으로 많은 사람들을 치료하여 의료선교의 중심기관이 되었던 광주 기독병원 등이 양림동 일대에 모여 있었습니다. 이 모든 유적들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어 광주지역 복음의 시작은 반나절 산책으로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백제가 망한 뒤부터 중앙의 정치권력과는 인연이 멀었던 광주는 수난 속에서도 느긋하고 구성진 지방문화를 발전시켜 민족문화의 원형을 가장 많이 간직하고 있는 도시였습니다. 그 가운데 양림동은 초기 선교지로서 기독교 문화의 보물 곳간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고풍스런 건물에서 묻어나는 짙은 복음의 향기가 벌써 들어와 내 속에 번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오, 주님, 빛고을 광주를 이토록 사랑해 주셨습니다.”
(광주의 모습)
나는 소록도로 간다
남원을 지나 순천
순천에서 벌교
다시 벌교에서 고흥으로
이곳을 지나 녹동으로 가면
남해의 파아란 바다를 안고 있는
소록도를 만날 수 있다
난 지금 열정의 땅을 지나
눈물의 섬으로 가고 있다
나환자 시인 한하운이 읊었듯이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가도 가도 천리길
먼 전라도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의 고장
열정의 땅 전라도를 지나며
눈물의 섬 소록도로 가고 있다
아기 사슴섬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처럼
아름다운 자연경치 자랑하고 있지만
정말로 아기 사슴의 슬픈 눈망울처럼
구슬픈 눈물이 수없이 뿌려진
눈물의 섬 소록도로 나는 간다
나는 왜 이곳으로 가는가
내 영혼에 묻어있는 찌든 때
말끔히 씻어 버리려고
예수 닮은 진짜 그리스도인들 만나려고
믿음의 보석을 찾아내기 위해
슬픔과 고통을 이겨내고
내일을 꿈꾸는 희망의 사람들을 만나려고
잃어버렸던 형제들을 만나보려고
난 오늘 뜨거운 사랑을 가슴에 품고 고향을 찾아가듯이
무더운 남도길 소록도로 간다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리
소록도공원 안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먼저 감금실과 검시실이 나오고 조금 더 들어가니 생활관이 나왔습니다. 이곳에는 한센병 환우들이 살아가던 모습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병원의 역사도 함께 알 수 있었습니다. 생활관에서 소록도의 역사와 유물을 보며 차분한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벽에 걸려있는 시가 눈에 띄었습니다.
일제시대 중국 북경대학까지 졸업한 지성인 한하운 시인의 ‘파랑새’라는 시였습니다.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되어
푸른 하늘 푸른 들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
울어 예리라
나는 나는 죽어서 파랑새 도리
이 시를 읊조리면서 생활관을 나오며 나병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병은 다 무섭고 다 아프고 다 생명을 위협하지만 낫고 나면 그뿐 몸은 여전히 푸른 숲처럼 싱싱하고 마음은 하늘을 나르는 기러기와 같은데 나병은 왜 나아도 흔적이 있고 통증보다 더 심하고 흉터보다 더한 마음의 아픔을 뿌려 놓는 것일까? 다른 병의 흔적은 몸 안에 있고 옷 속에 감출 수 있지만 나병의 흔적은 얼굴과 손 드러난 곳에서 춤을 추고, 그가 생채기를 내고 지나간 흠집에는 죽음보다 무서운 고독의 바람이 붑니다.
“오, 주여 파아란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고 싶습니다.”
(소록도공원 감금실)
하나이 원장 창덕비
난 지금 눈물의 섬 소록도에 와서
일본 사람 비석 앞에 서서
참 신기한 감동에 사로잡혀 있다.
우리나라 사람도 아닌 일본 사람의 덕행을 기리는
창덕비 앞에서 가슴 벅차 떠날 줄 몰라 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소록도병원 두 번째 원장을 지낸 하나이 젠기스(花井善吉). 그는 소록도 환우들에겐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고마운 사람이다. 그가 원장으로 있었던 8년 4개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정신으로 병원을 이끌어 소록도 환우들이 자유롭게 믿도록 해 주었다. 이때 구북리 1호사에서 수십 명이 모여 첫 예배를 드렸는데 이것이 소록도 교회의 시작이다. 처음엔 병실에서 예배드리다가 교인 수가 늘자 1923년 12월 25일 성탄절 예배를 신사(神社)에서 드렸는데 이것이 소록도 최초의 성탄예배였다. 일본 신도(神道)의 신사에서 드린 성탄예배. 이것 확실히 예배처소를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모든 성도의 소원을 들어주신 하나님의 역사였다. 많은 환자들이 절망을 안고 소록도에 왔다가 교회에서 소망을 만나게 되어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환우들이 떠나온 집과 소식을 주고받고, 만나보고, 고행을 방문하도록 길을 열어주었고, 3년제 보통학교를 세워 환자의 자녀들이 배울 수 있도록 해 주고, 돈벌이 사업을 하여 그 남은 돈으로 환자를 도왔으며, 책 읽으라 북돋워주고, 문화공연을 하여 환자가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막았다. 그는 이웃 땅을 사서 200명의 환자를 더 수용하도록 병원을 늘려가기도 했다.
1929년 10월 16일, 하나이 원장이 세상을 떠나자 소록도의 환우들은 아버지를 잃은 듯 슬픔에 빠졌다. 그들은 뜻을 모아 1930년 9월에 하나이 원장 창덕비를 구북리 어귀 맨 처음 자혜병원 동쪽에 세웠다. 한국인 환우들이 정성을 모아 일본인 원장의 공덕비를 세운 것은 소록도 동산에서만 볼 수 있는 아주 색다른 일이었다. 지금도 환우들은 그 언덕을 오갈 때만다 하나이 원장을 생각하며 고마움을 보이고 있다.
하나이 원장. 그는 비록 일본사람이었지만 민족과 종족을 뛰어넘어 이웃의 아픔을 나의 것을 받아들여 착한 사마리아 사람으로서의 삶을 살아갔다. 그의 사람 사랑은 오늘도 그 공적비 앞을 지나는 사람들의 가슴에 향기로 남아서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이 원장 창덕비)
김교신과 문둥아
근세 한국 정신사에 길이 남을 선각자 가운데 김교신 선생이 있습니다. 그는 한국의 흙으로 빚어져 한국의 흙을 디디고 살다 한국의 흙으로 돌아간 민족의 교사였습니다.
김교신 선생의 소록도 나환자 사랑은 남달리 뛰어났습니다. 1935년 3월 16일 김교신은 처음으로 소록도의 나환자 문신활(文信活)의 편지를 받고 큰 충격을 받고 이제부터 소록도의 5천 나환자 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코이노니아를 맺는 일에 온 정성을 쏟으리라고 다짐하였습니다. 그 후 그는 소록도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쏟았고 소록도에서 온 편지를 <성서조선>에 요약해서 공개했습니다. 그는 소록도의 믿음의 형제들에게 모든 수단을 다해 원조의 손을 펴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을 위로하는 글을 썼고 그들이 원하는 <성서조선>지를 값없이 주었으며 구라사업 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나환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기 위함이요” “섬은 성한 이에게 천국을 지적하는 소임의 자리”라고 규정한 이 사랑의 사도 김교신은 “우리 문둥아 안심하고 요구하며 대담하게 명령하라. 주 예수로 인하여 나는 군등(君等)의 종이다. 인색하고 꺼려하는 것 남아있으면 머지않아 나도 소록도에 수용될 자 되리라”고 외쳤습니다. 그는 나환자들과 친구하면서 부터는 ‘우리 문둥아’로 부를 수 있는 세계를 가졌습니다.
김교신의 사랑은 교실의 학생에게 국한되지 않고 소록도의 나환자들, 그리고 선생이 교직에서 쫓겨난 뒤에는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서 강제 징용되어 일하고 있는 5천명의 노동자들에게도 확대되었습니다. 그는 이들의 복리 후생 교육을 위해 일하다 전염병에 걸려 며칠 만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 주여, 김교신 선생이 그립습니다.”
한하운 시비
사슴섬 소록도 중앙공원에 가면
나환자 시인 한하운의 시비가 있다.
방석 바위에 하늘을 보고 글이 새겨져 있는데
‘보리피리’란 시이다.
“보리피리 불며 봄 언덕
고향 그리고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꽃 청산
어릴 때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인환의 거리
인간사 그리워 피-ㄹ 닐니리
보리피리 불며 방랑의 기산하
눈물의 언덕을 지나 피-ㄹ 닐니리”
어린 시절 철없이 산과 들 뛰어다니며
보리피리 불던 그 시절이 그리워 지은
한하운의 한 맺힌 피눈물의 시다.
그런데 왜 이 시비는 바로 세워져 있지 않고
누워서 하늘을 보고 있는 것일까?
마음먹고 이렇게 했는지 아니면 바위를 바로
세울 수 없어 자연석으로 파묻고 위를 평평하게
방석처럼 깎아 글로 남겼는지 모르지만
내 가슴 왠지 슬픔으로 밀려온다.
틀림없을 것이다.
이 시를 사람에게 보이려고 바위에 담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읽어 보시라고 마음먹고 하늘을 향하여 쓴 것이리라.
따지고 보면 사람 모두 별 것 아니고
지나간 일 이런 시절 그리워 할 것도 없다.
좋든 나쁘든 한번 주어진 인생길
거쳐 가는 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시비 위에 올라서서
보리피리를 소리 내어 읽고 내려왔다.
비가 그치고 그름 사이로
파아란 하늘이 띄엄띄엄 보인다.
알 수가 없다
한하운은 나환자 시인입니다. 그는 나환자를 대변하여 나병의 끔찍함과 서럽고 괴로운 고뇌를 알렸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시 “소록도 가는 길”이 이런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습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룸거리다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짤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위의 시는 나환자는 거리의 나그네요 신을 벗을 때 발가락이 짤리는 비참한 신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하운 시비가 있는 소록도 공원을 나오면서 이런 생각에 잠겨 보았습니다.
“세상은 갖가지 질별의 나라. 고통하고 신음하고 슬픔으로 지내다가 낫고 나면 활짝 웃음으로 사는데 알 수가 없다. 나병은 왜 나아도 슬픈지.”
“오, 주여, 나병은 알 수 없습니다.”
소록도의 순교자
눈물의 섬 소록도에서 버림받은 나환자 양떼 가슴에 안고
4년 5개월 사랑의 종노릇하다가 끝내 순교의 제단 위에
붉은 피를 뿌리고 하늘로 올라가신
참 사랑의 목자 김정복 목사님
건강도 돈도 가족도 희망도 모두 잃어버리고 절망하는
소록도 교회 사천이 넘는 나환자들에게
사랑스런 아버지가 되어
자신은 양복 한 벌 만족하여 방에 불을 못 때서
냉골 신세로, 식량이 없어서 가난하게 살면서도
허기진 양들 찾아다니며 주머니 열어
알사탕(아미다마) 비누 먹을 것을 날라주던
소록도의 천사 김정복 목사님
6. 25전쟁이 일어나 인민군들이 소록도에까지 들어와
교회 간판 내리고 찬송 기도 못하게 하고 공화국 노래
가르치던 때 “목사님만은 사셔야 합니다.
교회는 우리들이 지키겠습니다. 피난을 가셔야 합니다.”하는
교인들의 마음 다한 애원에도
“나도 압니다. 그러나 이 연약한 양떼를 버려두고 어디로 갑니까?
늙은 이 몸 살자고 도망갈 수는 없습니다.” 뿌리치며
끝까지 오직 양떼와 교회를 지키려 했던 어진 목자
굴날 뿌리 동굴에 들어가 금식 기도하다가
공산군에게 붙잡혀 고흥 경찰서로 끌려가면서도
“사랑하는 여러분! 어려움이 와도 믿음의 절개를 끝가지
지킵시다. 우리 천국에서 다시 만납시다.” 하고 교인들에게
손을 흔들며 마지막 헤어진 신실한 목자
한 달 가까이 고흥 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으면서
심문과 고문으로 지칠대로 지쳤지만 자신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 옴을 알고 “이제 마지막이 가까워 온줄 압니다.
제게 힘 주셔서 하나님만 의지하게 해 주셔요. 고통 때문에
믿음이 흔들리지 않게 해 주시고, 우리 소록도 교우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을 지켜주십시오. 힘과 담대함을
주셔요.” 하고 마지막 날을 준비하며 양떼 위해 기도하던 목자
인민군에 의해 고흥 경찰서 뒷산으로 끌려가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나무에 묶여
“하나님 아버지, 이 죄인을 순교의 제물로 삼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 소록도 교우들을 지켜 주십시오.
제 영혼을 받아 주십시오.”하고 기도한 뒤에
수십 발의 총소리와 함께 고흥 뒷산의 새벽을 깨우며
앉은 자세로 기도하다가 이마에 총을 맞고
1950년 9월 30일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소록도의 순교자 아가 사슴섬의 눈물의 성자 김정복 목사님
소록도에 흐르는 순교의 피
이 피 이 피 이 피
사랑으로 그 양들에게 흐르고 흘러
오늘 우리들에게까지 생명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소록도 중앙교회)
죽어서도 전도한 사람
소록도의 순교자 김정복 목사님. 이 땅의 나이는 69세였습니다. 정확하게 계산하면 68년 2개월 6일간의 나그네의 삶을 끝내고 그는 하나님 나라로 갔습니다. 그는 인민군들에게 고흥 뒷산으로 끌려가 앉은 자세로 기도하다가 이마에 총을 맞고 이 세상을 떠나 눈물과 아픔이 없는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김정복 목사님과 우익 청년들의 시체는 고흥경찰서 뒷산에 버려졌습니다. 인민군이 떠나고 나가 고흥읍에 살던 부인 홍영이 시체를 수습하였습니다. 3개월이 지나 새로운 묘소로 시신을 안치하기로 하고, 시체가 부패했으리라고 생각하고 함석관을 땜질하여 준비한 후 가매장한 시체를 팠더니 시체가 상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예수 믿지 않는 일꾼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어르신은 참 귀한 분이다. 하나님을 섬기기에 이런가 보다. 우리도 하나님을 믿어야지.”
죽어서 시신으로 마저 전도한 김정복 목사님. 그는 사나 죽으나 영혼을 사랑하는 참 목자였습니다. 세월이 흘러 1977년 9월 30일 당시 소록도 교회를 맡았던 김두영 목사님은 중앙예배당 앞뜰에 김정복 목사 순교기념비를 세우고 그 높은 순교신앙을 기다렸습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은 ‘샛별’이란 시 한편이 새겨져 잇습니다.
버림받은 병든 양떼 가슴에 안고
말씀으로 가꾸고 기도로 길러
보석보다 귀한 은혜 복음사명을 이 동산 양떼에게
맡겨 주셨네
오직 불구 이 몸 묶여 예수 이름을
멀리 가서 사람에게 전도 못하나
별 따라 순교의 피여
십자가 제단 앞에 쪼개 들려서
산 제물로 주님 뒤를 따라가리라
“오, 주여, 사나 죽으나 주님만 나타내게 하소서.”
(김정복 목사 전기 표지)
소록도와 애양원
내가 한반도의 가장 남쪽 끝자락
소록도와 애양원엘 그리도
가보고 싶어 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그곳에 가면 그 땅을 밟으면
아름다운 사람들의 향기를 담아가지고 오기 때문이다
고흥반도 소록도 교회를 맡았던 김정복 목사님
여수 애양원 교회를 섬겼던 손양원 목사님
이 두 사람은 신기할 정도로 서로 같은 데가 많다
먼저 그들이 목회한 곳이 전라도 남쪽 끝이고
평양 신학교 선후배 사이로
김정복은 17회 손양원은 31회였다
나이와 신학교 졸업은 김정복이 훨씬 위이지만
손양원을 강사로 초청하여 부흥회를 열고
안수도 축도도 받을 정도로 그들은 서로 존경하고 아꼈다
둘 다 일제 말기에 신사참배 반대하여
감옥살이 하고 버림받은 나환자들의 아버지가 되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버렸다
전쟁이 일어나도 끝까지 도망가지 않고
교회와 양들을 지키다가 공산당에게 잡혀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교했는데
손양원은 1950년 9월 28일에
김정복은 이틀 뒤인 9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가보라
사랑의 흔적이 있는
소록도와 애양원으로
만나보라
향기 나는 사랑의 사도
김정복과 손양원을
(애양원교회)
손양원과 김정복
1945년 8월 15일 눈물의 섬 소록도에도 봄이 찾아왔습니다. 여기 저기 진달래가 피어나던 1946년 애양원교회 손양원 목사님의 사회로 중앙교회에서 김정복 목사님을 모시고 열흘 동안 부흥사경회를 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김목사님의 설교에 은혜를 받고 회개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소록도의 교인들은 김정복 목사님에게 소록도 교회를 맡아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때 손양원 목사님은 소록도와 똑같은 처지에 있는 여수 율촌 애양원교회를 맡고 있었기 때문에 김정복 목사님이라야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주선했기에 소록도에 가게 되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나환자촌에서 이미 목회를 하고 있었으나 이 어려운 시기에 나환자의 마음을 치료해 줄 사람은 바로 김정복 목사님으로 알고 그를 강하게 밀었던 것입니다.
손양원과 김정복. 그들은 사상이나 이념이 같았습니다. 같은 순천노회에 있는 목회자로 신사참배 단대에도 함께 나섰습니다. 두 분 다 애석하게도 6. 25전쟁으로 순교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 두 분의 정신을 온 백성에게 알려야 한다면서 만들어진 영화가 있습니다. 손목사님에 대한 영화는 ‘사랑의 원자탄’이고 김목사님에 대한 영화는 ‘사랑의 뿌리’입니다.
소록도와 애양원은 김정복과 손양원의 사랑의 연결고리로 하나가 되고 친구가 되며 교통이 이루어지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하나 되게 하는 신비스런 영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미움과 분열은 사라지고 하나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 주여, 소록도와 애양원은 하나입니다.”
(사랑의 원자탄 표지 및 사랑의 뿌리 한 장면)
지금 소록도에선
나환자하면 소록도 소록도하면 나환자
나환자의 상징이 되어버린
전라도 남쪽 끝 동떨어진 섬 소록도에선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한 때 이곳에 육천을 헤아리는 많은 나환자들이 살았는데
지금 739명의 나환자들만 남아 있다.
이곳 병원에서 치료받고 다 나아 여길 떠나
정착촌에서 제 힘으로 살아가고 있기에
지금 소록도에는 제 힘으로 살아가기 어려운 사람들
손 발 제대로 쓸 수 없는 심히 약한 사람들
앞을 못 보는 사람들만 외롭게 남아
나라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간다.
세상을 버린 사슴섬 사람들
하지만 하늘을 향한 애타는 희망이 있는 사람들
믿음으로 쓰라린 괴로움을 승화시켜 가는 사람들
믿음이 없었다면 절망에 빠져 벌서 자신을 버렸을텐데
이 믿음 때문에 그들은 우리들보다
더 보람찬 삶 하늘나라의 삶을 누리고 있다.
소록도는 그야말로 믿음섬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고 있다.
한해 70명이 넘는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간다.
그러면 10년 뒤엔 소록도의 나환자는 다 없어지고
그럴 경우 이곳은 국립공원으로 열리게 될 것이다.
한 시대의 슬픈 역사가 사라지고 있다.
온갖 슬픔과 기쁨이 남겨진 소록도는 전설의 섬으로 남을 것 같다.
지금 나병은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여 새로운 환자가 생기지 않는다.
지금은 피부병으로 다스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왜 나환자를 멀리 하는가?
왜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가?
왜 사회에 돌아오는 것을 막고 있는가?
그것은 지난 날 비참했던 역사 때문이다.
불행했던 시대에 태어나 시대와 함께
슬픔과 눈물을 흘려야 했던 소록도 사람들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으로 다가가자.
지금 소록도는 바뀌고 있다.
슬픈 역사가 씻기고 있다.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원형적인 믿음의 세계를 맛보려면
예수 닮은 사람들 모여 사는 사슴섬에 가보라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한피 받아 한몸 이룬 형네의 사랑으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
포교하다 되레 거듭나
소록도 북성교회 남효선 장로님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원광대를 졸업한 원불교 출신의 한 청년이 가장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몸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소록도를 찾아왔습니다.
나환자들과 같아지기 위해 눈썹을 깎고 머리를 밀었고 잠을 줄여가며 원불교의 가르침을 전했지만 도무지 먹혀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나환자들이 거꾸로 이렇게 전도했습니다. “당신은 우리를 불쌍히 여기지만 사실은 당신이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얼마나 행복한데요. 예수를 믿으세요.” 희망을 가질 이유가 전혀 없으나 늘 천국 같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보며 점점 지쳐가던 청년은 어느 날 법당에서 경을 외우다가 자기도 모르게 복음성가를 부르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환자들을 전도하러 갔다가 오히려 전도를 받는 놀라움을 체험한 이 청년은 가족들의 반대를 뒤로 하고 신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목사가 되어 우wm베키스탄 선교사로 파송 받아 우즈베티스탄 장애인 국가대표팀의 축구 감독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가 이민교 선교사입니다.
흰 사슴 두 쌍이 동네마다 다니면서 환우들과 어울리는 평화와 사랑이 가득한 섬 이곳 소록도에선 향기가 피어나고 있습니다. 그 향기는 바로 예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맡는 이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강한 능력이 되어 오늘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서 나오는 맑은 향기라 나라를 살리고 교회를 새롭게 하며 죽어가는 영혼들을 구원할 것입니다.
“오, 주여, 소록도에선 향기가 납니다.”
길두리의 성자
나는 지금 눈물의 섬 소록도를 나와 녹동항에서 고흥군 포두면 쪽으로 차를 돌려 길두리로 가고 있다. 살아있는 순교자 길두리의 성자라고 일컬어지는 박석순 목사님을 뵙기 위해서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물어물어 찾아갔더니 마침 그분이 계셨다. 지금은 길두교회 원로목사님이신 91세 되시는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침대에 누워 계셨다. 몇 마디 이야기도 듣지 못하고 그 얼굴 한번 뵙고 나온 것이 오늘까지도 내 마음 속에 긴 감동으로 남아 있어 행복하기만 하다.
6. 25 당시 여섯 자녀와 부인을 북에 두고 남으로 내려와 홀로 지내면서 1951년부터 30여년 동안 길두교회를 맡아 15교회를 세우고 천년을 하루같이 오직 교회만 사랑하고 복음만 전하며 살아오신 그였다.
박석순, 그는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긴 나머지 미국 대통령의 영혼이나 거지의 영혼이나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값지다고 말하면서 가난한 이 넉넉한 이 귀한이 천한 이 가리지 않고 똑같이 사랑하면서 복음을 전했다. 집 없는 사람에겐 집을 지어 주었고, 먹을 것이 없는 사람에겐 먹을 것을 주었고, 학비가 없는 사람은 학비를 대 주었다. 그는 한 푼의 동전조차도 자기를 위해선 결코 쓴 적이 없고 자기 손에 들어온 돈은 모조리 개척교회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썼다. 그는 한 사람 바로 가르치면 사도 바울처럼 큰일을 하게 된다고 믿고 학생들의 학비, 교사들의 사례비, 학교 운영비 모두를 책임지고 중고교 과정의 고성학교를 세워 지금까지 졸업생 800여명을 내보내 그 가운데 40여명이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한 사람을 키우는 어진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결코 떠들썩하거나 어떤 신비한 방법을 쓰는 것이 아닌데도 그의 기도는 능력이 있었다. 귀신이 쫓겨 가고, 온갖 병들이 고침 받았다. 바울처럼 누구보다 응답도 받고 환상도 보고 체험도 많았지만 항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수줍은 듯 겸손해 하면서 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나버림의 목자였다. 그의 기도와 금식 그리고 말씀 묵상은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을 만큼 뛰어났다. 부흥회 강사로 가는 교회마다 완전 금식하며 한 주간 동안 무려 14차례나 2시간 넘게 말씀을 전한 참 신기한 능력의 목자였다. 그에겐 말씀과 기도가 삶 자체였다. 그는 동네 골목에서 뛰어나오는 고마 아이들에게도 먼저 고개 숙여 인사를 건네는 낮아짐의 사랑의 목자였다.
고흥 시골 마음 길두리의 성자.
우리 시대의 마지막 성자 박석순 목사님.
그는 분명 고흥반도를 주님의 향기로 채워가는 십자가의 꽃이었다.
우리 한국교회 안에 아직 이런 분이 남아 계시다는 사실에 정말 가슴이 뿌듯했다. 이제 이런 분이 세상을 떠나고 나면 우린 어디서 다시 이런 참 목자를 찾아볼 수 있을까? 길두리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한 말이 지금도 사라지지 않고 내 마음을 울리고 있다.
“요새 세상에 그런 분 없당께요. 목사님네들이 그분의 반만 따라도 우리나라 좋아져뻐린 당께.”
(전남 고흥)
문중의 논을 내던지고
박석순 목사님은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성령께서 무슨 일이나 명하시기만 하면 밤이고 낮이고 시간을 가리지 않고 일하셨습니다. 처음 김익두 목사님이 인도한 집회에 참석하여 큰 은혜 받고 나서 천당과 지옥의 그림을 그려가지고 장날마다 나가서 전도할 정도로 성령의 역사에 완전히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번은 축호전도 나갔는데 어느 한 집이 교회에 나올 수 없는 딱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문중의 논농사 지으면서 시제 때마다 제사음식을 마련해야만 살아가기 때문에 만일 교회에 나가면 살 길이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 1년에 쌀이 얼마 정도나 필요합니까?”
“아무리 적게 잡아도 먹을 양식 포함하여 18가마는 필요해요”
그 후 얼마쯤 지나서 집주인이 자고 일어나자 18가마의 쌀이 자기 집으로 들어와 있었습니다. 박석순 목사님이 빚을 내어 보내준 쌀이었습니다. 여기에 크게 감동한 그 집 부부는 문중의 논을 다 내던지고 교회에 나와 주님만 섬기면서 나중에는 집사까지 되었습니다. 목사님이 그 많은 쌀을 빚내어 주고서 한 가정을 살린 것이었습니다.
길두리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흥은 축복받은 땅이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그리도 많은 태풍이 한반도에 왔으나 고흥 땅은 거의 피해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사람 의인 박석순 목사님이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불신자들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에 엘리야 선지자가 있어 하나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듯이 고흥 땅도 하나님의 그런 은혜를 받고서 살고 있다고 그들 모두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오, 주여, 의인이 있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길두리 해창만 간척지)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전주에 내려온 나의 관심의 모두는 어두웠던 일제시대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 전주의 의인이라고 불리우는 이거두리(이요한) 선생의 묘소를 찾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서문교회 김상수 집사님의 안내로 전주시 완산구 색장동 산골짜기에 있는 그의 묘소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거두리 참봉 전주 이공 성한 지묘”라는 묘비가 서 잇는 그곳은 참으로 고요하고 인적이 전혀 없는 새들이 노래하는 곳이었습니다. 여기서 이 거두리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어느 날 이거두리의 집에 떼강도들이 들어서 그의 아버지를 칼로 찌르고 양식과 귀중품을 빼앗아갔습니다. 이때 하인들이 주인의 고통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전주 진료소에 연락을 했습니다. 마침 전주에 의료선교사로 와 있던 포사이드(보의사)가 급히 진료 가방을 챙겨들고 그 가정에 도착하여 이씨 양반을 치료해 주었습니다. 전주 진료소에서 돌아오려고 하니 이미 해가 져서 그 집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날 밤에 강도들이 또 들어와 이번에는 포사이드의 귀를 칼로 쳤습니다. 왼편 귀가 절반쯤 잘라져서 너덜거리는데도 포사이드는 엎드려서 “오, 하나님, 이 사람들을 용서해주시고 꼭 예수 믿고 구원받게 해 주셔요.”하고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이보한은 예수 믿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아버지의 병이 다 낫기를 기다렸다가 전주로 가서 포사이드를 도우며 성경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전도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거리나 장터에 나가서 우렁찬 목소리로 “새벽부터 우리 사랑함으로써 저녁까지 씨를 뿌려봅시다. 열매 차차 익어 곡식 거둘 때에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거두리도다. 거두리로다.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이렇게 찬송을 부르고 사람들이 모여들면 전도 강연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거두리”라는 별명이 붙었던 것입니다.
“오, 주여, 나도 새벽부터 저녁까지 거두겠습니다.”
온고을(전주) 복음
유림과 동학의 땅 전주에 복음이 들어온 것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였습니다. 전주의 기독교 유적지는 중화산동과 서완산동에 기독교학교와 병원이 모여 있습니다. 완산구에는 1893년 세워진 호남지방 최초의 교회인 서문교회와 종탑이 있고, 서문교회 건너편 중화산동 일대에는 1900년 문을 연 호남지방 최초의 여학교인 기전여고와 기독교 명문인 신흥중고교가 있습니다. 기전 여학교와 신흥학교는 일지세대 민족의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기관으로 독립운동의 거점이 되었습니다. 두 학교는 1937년 일제에 의해 문을 닫는 순간까지도 크고 작은 민족독립을 위한 학생운동을 주도한 학교입니다.
전주 예수 병원은 전주 최초의 근대 의료기관으로 1897년에 의료선교사인 잉골드에 의해 세워졌는데 1903년에는 한 해 동안 1500여명의 환자가 진료 받음으로 많은 사람들을 예수께로 인도하였습니다. 현재 예수병원을 바라볼 수 있는 언덕에는 선교사들의 묘지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1895년 이후 전주 군산지역에서 활동하다가 순직한 선교사와 가족묘지로 전킨 선교사와 린네데이비스 해리슨, 데이비드 랜킨, 넬리 랜킨 선교사, 박영훈 장로(예수병원 신경외과장) 등이 묻혀 있습니다.
온갖 것을 갖추었다는 온고을 전주는 빛고을 광주와는 달리 조용하면서도 영감이 깊이 배어 있는 도시였습니다. 전주 선교는 병고에 시달리는 환자를 치료하고 겸하여 복음을 전하고, 신도의 자녀는 교육을 시켜 사회와 교회의 지도자로 삼는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오, 주여, 온고을 땅에 온전한 복음이 들어갔습니다.”
(모악산 정상에서 바라본 전주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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