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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언 소식 2005.6 창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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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mapocmc 작성일15-10-27 20:26 조회3,27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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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님을 아십니까?

 

 

 

김종순 (발행인, 화양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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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평소 너무 짧은 생애를 마치고 가신 두 분 목사님만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한 분은 독일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1906-1945) 목사이고 다른 한분은 한국 감리교 목회자 이용도 (1901-1933) 목사이다.

 본회퍼 목사와 이용도 목사는 두 분 다 20세기 초 세계사가 전 쟁의 소용돌이 속에 신음할 때 각각 독일과 조선에서 태어난 뛰어난 하나님의 종들로서 두 분 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아까운 생을 마감한 분들이다.

 본회퍼는 1943년 4월 5일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받고 테겔형무소에 수감되어 18개월을 보내다가,  1944년 7월 20일 집단 수용소로 이송된 후 1945년 4월 8일 이른 아침 교수형 을 당한다. 그리고 한 달 후인 5월 8일에 독일이 연합군에 항복하게 된다. 한 달만 더 오래 살아있었더라면 세계사 속에 교회와 신학사상에 위대한 변혁을 일으킬만한 신학자요 목사가 히틀러에 의해 무참히 죽임을 당한 것이다. 나는 가끔 그가 살아 있었다면 분명 세계 신학사상이 달라졌을 것이라고 애석해하며 가슴 아파한다.

 그리고 이용도는 1901년 태어나 일제 강점기를 온 몸으로 살아 낸 애국청년 애국목사였다.『이용도 목사전집 제5권 사모의 세월』 90쪽에 보면 이용도 목사의 마지막 사진 (1933년 8월 1일 삼방에서)이 나온다. 이 사진은 그가 결핵으로 죽기 두 달 전에 요양 중이던 삼방에서 찍은 것인데 측은지심을 불러 일으키는 모습이다.

 요양하러 갔으면 요양만 할 일이지 목숨을 담보로 죽기로 작정하고 요양 중에도 계속 심혈을 쏟아가며 부흥회를 인도하다가 결국에는 33세의 나이로 하나님 나라로 불리어 가셨다. 참으로 애석 하고 가슴 아픈 일이다.

 한국의 유명한 영적 거목들 한경직 목사, 김정준 목사, 변종호 목사, 김창인 목사,  윤성범 목사 등등 모두가 죽음에까지 이른 결핵환자들이였음에도 불구하고 80에 가깝도록 사셨고, 어떤 분은 100세에 가깝도록 사시면서 한국교회와 목회와 신학사상에 놀라운 영향과 변혁을 가져왔는데, 이용도 목사는 왜 그다지도 병든 자기 몸을 돌아보지 않고 과로하다가 병에 쓰러져서 그토록 일찍 한국교회와 성도들 곁을 떠나셨는가 안타까워 가슴을 쓸어내리며 원망해 보기도 한다. 이용도 목사도 다른 분들처럼 해방 후 80년대 중반까지 살아계셔서 활동하셨다면 한국교회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을까 생각해 본다.

 바울의 말씀대로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 이용도 목사는 지금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것이나 그분의 삶과 사상과 열정과 사랑은 지금 도『이용도목사 전집』을 통해 우리들 정신과 가슴 속에 숨결처럼 다가오고 있는 것을 느끼고 체험하게 된다.

 그분이 지금 우리 곁에 계시다면 어떤 모습으로 서 계실까? 무슨 말씀으로 우리 후배들에게 가르침을 줄 것이며 무슨 말씀으로 한국교회들에게 메시지를 주실 것인가? 이 타락하고 혼탁한 세대,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와 교회를 향해 외치는 그분의 영성(靈聲)은 무엇인가?

 풍성하고 찬란한 생명의 계절에 그분을 이야기한『이용도목사 전집』을 통해 우리의 삶에 사랑과 열정과 순전함과 영성이 충만하기를 기원해 본다

 

 

 

이 성전을 헐라

 (요한복음  2:13~22)

 

 

박봉배 박사 (전 목원대학교 총장)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처음으로 행하신 일이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일입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대로 예수님께서는 성전 안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쫓으시고 그 장사하는 상을 엎으시고 양과 염소를 몰아내시면서 일장 소란을 일으키셨습니다. 봉독한 요한 복음에는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 사람들과 짐승들을 내쫓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자하시고 자비하신 주님, 세상에서 지탄받던 세리와 죄인들, 연약하고 천대받던 여인들과 병든 자들을 그리고 심지어는 간음한 여인까지도 용서하신 주님이 이렇게 난폭한 행동을 하시면서 성전을 정화하신 것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자비와 사랑이 넘치시는 주님이시지만 때로 잘못된 일을 보시고는 가차 없는 책망과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날카로운 비판을 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3:5에 보면 예수님께서 “노하심으로 저희를 둘러보시고(He looked around them with anger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13:32에는 “가서 저 여우(해롯)에게 이르되(Go and tell that fox)”라고 말씀하고 계시며 마태복음 16:23에는 십자가의 고난을 말리는 베드로에게 ”사탄아 내 뒤로 물러 가라(Get behind me Satan.)” 라고 거침 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더구나 예수님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신 것은 너무나 지나치다고 생각되리만큼 혹독하였습니 다.

 그렇다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악독하고 지탄을 받아야 할 사람이었는 가? 반문해 봅니다. 오늘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제사장은 감리교의 감독회장이요,  장로교의 총회장이요,  가장 좋은 예는 천주교의 교황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오늘의 신학자들이나 목회자들이고 바리새인들은 이름난 평신도 지도자들 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즉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고 일반적으로 백 성들에게 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 그렇게 자비와 사랑을 베 푸신 사람들 즉 죄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범하여 종교적으로 정죄받은 자들이고,  세리 는 로마의 앞잡이로 동족을 수탈하는 매국노였고, 병든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그래서 일반 사람들과는 같이 살 수 없었던 소외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저주받은 그들은 사랑과 자비로 받아들이면서 당시의 종교적 지도층에 대해 서는 그렇게 혹독하게 비판을 하신 것일까요? 마태복음 23장에 보면 서기관과 바리 새인들을 향하여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고 거의 저주에 가까운 책망을 하고 계십니다.

 이런 사실들 중에서도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까시려고 회초리를 드셨을 때의 모습은 실로 무서우리만큼 과격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행동을 앞에 놓고 유대인들은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행하느냐고 묻는 대신에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뇨”라고 질문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성전된 자기 몸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고 3일 만에 부활하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뜻을 알리 없는 유대인들은 “이 성전은 46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3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라고 반격을 하였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입장에서는 지당한 말인지도 모릅니다. 눈에 보이는 찬란한 성전,  그리고 이 성전을 중심하여 수 백년 동안 보존되어 온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전통과 권위,  그리고 그 상징인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는 말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점은 유대인들과 특히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위험한 존재였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행적과 그를 따르는 수 많은 군중들을 바라보면서 이러다가 우리는 완전히 망하는구나 하는 위기감을 느낀 것이 당대의 종교적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또한 민중의 지지를 받고 기세가 양양하던 평민당인 바리새인들의 입장은 더욱 심각하였습니다. 즉 민중들의 인기를 독차지하다시피 하였던 그들에게는 청천벽력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두개파의 제사장 계급,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모두가 이 말썽꾼인 예수를 처치하지 않고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팽만하여 원수지간이었던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마저 하나로 뭉칠 지경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하자면 종교적 기존 세력들과 이들의 권위와 존재에 대해 정면으로 대항하였던 예수님 사이에 생사를 건 싸움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유대인들이 당시의 종교적 집권자들의 사촉과 선동을 받아 마침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게 된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도 기존적인 교권세력들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개혁세력 사이의 갈등 속에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트뢸치의 말을 빌리면 복음의 핵심을 그대로 유지하려는 섹트(sect)형과 세상과 타협하려는 교회(church)형의 갈등 속에서 발전해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에서부터 중세까지는 기존의 교권과 교회의 갱신을 강요하는 수도원 그룹 사이의갈등 속에서 발전해 왔습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그 좋은 예입니다. 기득권을 그대로 유지하려 는 교권세력과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개혁세력 사이의 대결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명한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중에 대심판자라는 장이 있습니다. 그 내용인즉 예수님께서 그를 고대하는 많은 성도들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세상에 다시 재림하시게 됩니다. 그리고 재림하신 예수님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시면서 많은 사람들의 추종을 받게 됩니다. 마침내 이런 사실이 당시의 종교적 권위자였던 대주교에게 전해지고 분노한 대주교는 예수님을 잡아다가 옥에 감금하게 됩니다. 그 대주교는 예수님 앞에 나타나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네가 진짜 예수인지 가짜인지는 알 바가 아니다. 혹 네가 진짜 예수라 하더라도 너는 이미 모든 권한을 베드로에게 위임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다시 세상에 와서 우리들이 하는 일을 방해하느냐? 어쨌든 나는 너를 내일 이교도들과 같이 화형에 처할 것이다.”라고 소리칩니다.

 물론 교회도 사회적 조직이기 때문에 조직과 제도 그리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법과 규율이 필요한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교회가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것에만 관심을 갖고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어긋나는 처지에 빠진다면 그 때에는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지 못 할 것입니다. 진실로 교회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망각하고 외형적이고 물질적인 면에서만 맴돈다면 주님의 책망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가 교회다워지는데는 교회의 본질을 외적인 면에서가 아니라 내면적인 면에서 파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용도 목사의 목회와 삶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들에게 남아있는 신학적 숙제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가 앞으로 다가오는 일본의 압제 속에서 기독교가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독교의 본질과 사명을 내면적인 면에서 올바로 파악하고 이를 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리라는 점입니다. 즉 일본의 정치적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압제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기독교의 내면화에 있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기독교의 핵심적 요소가 무엇이냐 하는 것을 금욕주의와 신비주의 속에서 찾으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 관점에 서 볼 때에 기존적인 종교의 지도자들과 교권이 하도 기대에 어긋나기 때문에 이용도 목사는 칼날 같은 비판을 서슴지 않고 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조선교회에 없는 것은 “기도, 개인전도, 열심, 사랑, 용기, 감사, 찬송, 협동, 성경공부, 구도심, 봉사, 가정기도요” 있는 것은 “잔말, 말질, 평론, 돈만 모으려는 생각, 게으름, 시기, 투쟁, 비겁, 공포, 불평, 근심걱정, 분열, 연문학, 구금심,  탐욕, 가정불안”이라고 하였습니다. 한편 직업 부흥사를 맹공격하고 교역자들 사이의 파당 문제를 한심한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조선교회의 모든 기관, 모든 사업은 굉장히 확대되는 모양인데 전도부흥을 위하여서는 아무런 열도 없다”고 하였으며 “예수는 죽이고 옷만 나누는 현대교회”라고 혹평하고 있습니다. 아마 기성교회와 교권에 대한 이러한 혹평이 그를 이단으로 몰고 간 하나의 중요한 이유가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복음을 한국이 받아들인 이후 숫자적으로나 외적인 면에서 상당히 발전하였고,  사회적인 면에서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한국교회가 일본의 기독교 말살 정책을 눈 앞에 두고 이 박해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오직 기독교 복음의 본질과 핵심을 금욕주의와 신비주의에서 찾아야 한다고 외치다가 33세라는 짧은 생애를 마친 이용도 목사, 그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교훈은 “고(苦)를 선생으로 삼고 빈(貧)을 애처로 삼으며 비(卑)를 궁전으로 삼아 육을 죽이는 것이오” 이를 통하여 “주의 사랑에 삼키운 바 되고 주는 나의 신앙에 삼키운 바 되는” 신성 속에서의 합일(unio mystica)을 이루어 “주님의 종이 되어 주님이 시키는 대로 구르기만 하면 된다”는 주장 입니다.

 이용도 목사가 장로교회에 의하여 이단시되고 감리교회에서도 정직처분을 한 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만 우리가 이용도 목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그를 신학적으로 연구하게 되는 것은 그가 처음으로 기성교회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함께 외형화되고 계도화되어 가는 한국교회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기독교 복음의 핵심으로 돌아가자는 외침을 한국적 상황에서 피맺히게 호소한 사람이라는 점에서입니다. 그리고 서양의 유명한 신비주의자 에크하르트(Eckhart) 나 타울러(Tauler)와 비견되는 심오한 신비주의자라는 점에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눈에 보이는 교회가 본질에서 벗어나 형식화되고 화석화되어 생명력을 상실했을 때에 아무리 장엄한 예루살렘 성전이라고 하여도 이를 헐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하여 새로운 생명력 있는 교회로 개혁하고 재건하는 것이 우리들의 사명이 아니겠습니까? 이런 관점에서 앞으로 이용도 목사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계속되기를 바라면서 이만 마칩니다. 

 

 

 

이용도 목사의 세가지 과제 상황

 

  

성백걸 박사 (한국기독교사상사연구소장)

 

 

 

 오늘 이렇게 귀한 역사적인 자리에 참석한 한 사람으로서, 우리 같은 부족한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우리 하나님께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글쎄요, 서평이라기보다는, 단지, 그동안 이번 이용도 목사 전집을 발간하는 과정에 좀 더 가까이 참여했던 사람으로서, 이 전집을 읽는데 어떤 시각, 어떤 관점에서 접근해야 좀 더 이용도 목사의 역사적인 진실에 다가갈 수 있겠는지,  말하자면, 그 전집을 어떻게 읽고 이해하고 해석하여야 하는지,  그 해석의 방향과 이해의 지평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당시 이용도 목사는 크게 세 가지의 과제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시대적인 배경과 관련된 삶의 자리에서 세 가지 정도의 역사적인 과제를 부여잡고 씨름해야 했습니다. 어떠한 책이나 작품이고,  그 배경을 알아야 그 내용과 의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데,  이용도 목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이 점에 착안을 잘 해야 합니다.

 첫째로,‘피폐한 전통의 변형’ 이라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태어난 1901년, 그리고 성장하여 자신의 역사적인 사명을 실천하고 생애를 마친 1933년에 걸친 시기에 우리 민족사가 직면한 가장 본질적인 과제는 급격하게 밀려오는 ‘서구적 근대’ 의 충격에 대면하여 우리의 전통을 새롭게 변혁해 내어 근대적인 삶의 지평을 개척해 내는 일이었습니다. 말하자면, 그간 우리 역사를 통해 가꾸어져 왔고, 가까이는 조선왕조 수 백 년을 통하여 생의 기반을 제공했던 전통 가치와 체제가 이제 근대적인 개화기라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창조적으로 자기 변형을 이루어내야 하는 큰 전환기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시기에 우리의 전통은 제대로 자기의 변혁이나 창조적인 변형을 이루어 내는 데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낡아빠진 구시대적인 생명억압 체계로 변질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끝내 우리 민족이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망국으로 떨어지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도 그‘전통’은 별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망국의 시련기를 살아야 했던 이용도 목사가 경험한 ‘전통’은 또한 그의 내적 생명을 건강하게 키우고 삶의 새로운 비전(Vision)을 제공해주는 창조적인 삶의 가치와 체계가 아니라 오히려 전제적이고 가부장적인 억압과 폭력의 부정적인 체제였습니다. 말하자면, 당시 이용도 목사를 비롯한 우리 겨레에게 기존의 전통은 그대로 기댈 수 있는 언덕이 아니라 어떤 점에서 낡고 쓰러져가고 피폐해진 구시대의 유물이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의 전통을 버릴 수는 없는, 전통을 버리는 것은 곧 자신을 버리는 것이기에, 오히려 그 전통의 본질적 가치와 생명력을 파악하여 새로운 시대의 삶의 지평으로 변형시켜야 하는, 아주 어렵고도 창조적인 과제를 수행해 내야 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전통의 재창조입니다. 바로 여기서 이용도 목사는 우리 전통의 진수와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진리를 자신의 몸 안에서 창조적으로 융합하여 새로운 생명의 지평을 개척해 내는 길을 갔던 것입니다. ‘피폐한 전통의 창조적인 변형’, 이것이 이용도 목사의 세계를 제대로 이 해하는데 우선 염두에 두어야 할 해석학적인 열쇠입니다.

 두 번째로, 이용도 목사의 큰 과제는 일제의 식민화정책과 식민주의를 극복해야 하는 과제 상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론, 그분만이 아니라 당시를 살았던 우리 민족 전체,특히 젊은 지성들이 안고 있던 역사적인 사명이었습니다.

 사실,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주의는 조선뿐만 아니라 아시아 전역에 휘몰아친 부정적인 파괴적 물결이었는데, 그것은 외적인 사회정치의 식민화 정책뿐만 아니라 내면적인 정신세계의 지배를 동반한 교묘한 것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사회정치적인 억압, 경제적인 착취, 문화적인 파괴와 왜곡과 함께, 어떤 면에서는 그보다도 더 위험하고 악랄하게 식민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내면세계, 정신세계, 가치세계를 왜곡하여 지배하는, 그야말로 교묘한 식민주의를 강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외적인 세계를 지배하는 식민정책뿐만 아니라 조선인들의 내면세계까지 식민화 하려고 덤벼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일제의 잔인하고 교묘한 식민지배와 식민주의는 시간이 흐를수록 그 부정적인 폭력의 강도를 강화하여 당시 우리 민족의 삶의 세계를 죽음의 세계로 몰아가고 있었습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이렇게 일제에 의해 자행되고 있는 어두운 죽음의 세력에 의해 비뚤어진 인간상의 노예로 혹은 부려먹기 좋게 식민화된 인간으로 전락하여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용도 목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실로 “죽음의 물결 위에 산 시체들,  산 송장들이 떠다니는 어두운 시대”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민족 전체의 내적 생명이 죽어가는 암울하고 절망스런 상황 속에서 이용도는 일제의 식민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개성에서 3•1운동에 참여했고,‘조선독립수비단'이라는 무장독립 단체에 금천군 대표로 가담하기도 했으며,‘태평양회의’사건 때는 송도고보의 동맹휴학을 이끌기도 하는 등 전후 5년여에 걸쳐 몇 번의 옥고를 치르며 강인하게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이 깊어지면서, 즉 그의 민족의식과 세계인식이 점점 더 성숙하면서 또 다른 차원에서 우리 민족과 세계의 미래를 개척하는 길을 가기 위해 신학과 목회, 신앙운동과 예수운동에 투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사회정치적이고 외적인 독립운동에서 이제 좀 더 본질적이고 내면적인 차원의 정신적이고 '영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여기서 바로 예수그리스도 복음의 진리가, 실로, 깊고 넓은 새로운 비전을 주었던 것입니다.

 세 번째로, 이용도 목사는 서구의 근대 제국주의와 그것을 뒷받침해 주고 있던 이른바‘오리엔탈리즘 (Orientalism)을 극복하며 새로운 삶의 지평을 개척해 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사실, 일제가 우리를 먹은 것은 일제만의 단독 행위가 아니라 그보다 앞선 서구의 근대 제국주의의 전철을 밟은 것이며, 그 과정에서 일제는 서구 근대 국가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에서 많은 것을 배워 사용했습니다. 특히 개항기와 개화기 이후 이 한반도 안에도 서구적인 근대 문명의 물결이 거세게 몰려왔는데, 거기에는 건강하고 창조적인 요소와 함께 아주 부정적이고 파괴적인 서구 제국주의의 문명우월주의, 인종주의 등이 동반되어 있었습니다. 즉 여기에는 비서구적인 세계를 무시하고, 저열하게 보고, 미개하게 보고, 식민화하고, 지배하는 것을 서구 근대 제국의 너무나 당연한 권리와 책임이라고 선전하는, 오랜 세월의 투자를 통해 교묘하게 고안된, 에드워드 사이드의 통찰을 빌리면, ‘오리엔탈리즘’ 이라는 서구의 지배담론이 들어있었던 것입니다. 19세기, 20세기에 걸쳐 전 세계를 휩쓸었던 서구적인 지배체제와 그 담론이 이 땅에서도 거세게 범람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그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던 온 인류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 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여기서 이용도 목사는 근대 제국주의의 탐욕과 전쟁욕과 지배욕에 대해 본 질적인 저항을 해나갔고, 그 과정에서 비복음적이거나 반복음적인 서구 제국주의의 행태와 담론에 물든 근대 오리엔탈적 기독교(Modern Oriental Christianity)를 비판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이용도 목사의 신랄한 선교사 비판이 가지고 있는 근본 의미입니다.

 이렇게 이용도 목사는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세 가지 과제 상황을 지니고 있었고,  그 극복을 위해 온몸을 바쳐 투신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분이 새롭게 찾고,  만나고, 믿고, 이해하고, 전한 예수 그리스도 복음이 새로운 삶의 세계로 나아가는 비전이요 길(道)이요 생명 중의 생명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중, 삼중의 생명억압 체제를 뚫고, 삼중의 딱딱한 동토를 뚫고 피어난 새로운 생명의 꽃이 바로 이용도 목사였습니다.

 바로 이런 이용도 목사를 통해 새로 출현한 창조적인 새 생명의 세계,  그 새로운 삶의 지평이, 그 조선적이면서도 인류보편적인 기독교 패러다임 (New Paradigm of Christianity)이 기독교 2천여 년의 역사에서나 우리 민족의 수천 년 종교사 혹은 영성사에서 아주 새롭고 색다른 지평으로 너무나 소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본질적인 가치와 의미를 잘 몰라서 그 분의 삶이나 그 분의 글,  그 편지나 일기를 눈으로 읽기는 읽으면서도 그 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이제 20세기 전반기에 식민지 조선 땅에서 이용도 목사를 통해 새롭게 출현한 생명 세계의 지평을 잘 파악하고 이해하고 해석하면, 그것은 우리 한국교회와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전 인류가 함께 공유하고 함께 향유하면서 새로운 인생과 평화의 세계를 열어나가는 과정에서 큰 빛과 도움을 줄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이 혼돈스러운 상황 속에서 생태계 회복, 평화통일, 계층과 지역과 세대 갈등의 창조적인 화합, 동북아시아와 인류의 평화추구 같은 과제들을 풀어가는 과정에서 이용도 목사가 열어 보여주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새로운 빛에 의해 수많은 영적 생명과 사랑의 꽃들이 만개(滿開)하기를 바라면서, 저의 부족한 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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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 목사가 그리워 지는 때

 

 

백 철 목사(관악하나로교회 담임)

 

 

들어가는 말


 

 16세기 서양 지식인들에게 ‘종교’ 란 말은 곧 ‘기독교’ 만을 의미했습니다. 그때는 요즘 우리가 듣고 말하는 종교다원주의 인식, 즉 기독교 말고도 다른 종교 전통들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가 가능하다는 인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종교개혁’ 이란 말은 곧 ‘기독교 교회개혁’ 을 의미했습니다. 제3천년대를 맞이한 이 때에 오늘의 기독교(특히 한국 기독교)가 과연 새 역사를 이끌어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그 누구도 “YeS”라고 장담할 수 없는 오늘의 한국교회 모습에 우리의 실망과 좌절의 늪은 깊어만 갑니다.

 지금부터 나누려는 생각이 사회과학적 실증이나 검증을 통과한 류(類)의 이야기가 아님을 먼저 밝혀둡니다. 단지 내 신앙의 순례에 스승으로서 나(목사)와 교회의 갈 길을 밝혀주는 분이기에, 그 분의 뜻과 살다간 자취를 더듬으며 우리(한국 기독교)의 모습을 조명해 보려 합니다.

 

 

이용도의 생애


 

 예수와 비슷한 33년의 짧은 생애를 살다간 이용도 목사(1901- 1933)가 바로 그 분입니다. 그의 짧은 삶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대주가(大酒家)였던 아버지와 시변리교회(황해도 소재,  이용도의 고향교회) 전도부인을 지낼 만큼 뜨거운 신앙으로 살았던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그는 16세에 개성의 송도고보에 입학합니다. 그러나 학문보다는 민족의 운명에 관심이 컸기에 독립 운동에 가담하였고, 그 결과 여러 차례의 투옥을 경험합니다. 이런 그의 불의에 항거하는 역사 참여 정신은, 후에 자신의 시대에 그 역사적 사명을 감당 못하는 교회의 무기력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교회개혁 정신으로 나타납니다. 그후 송도고보 교장 왓슨 선교사의 권유로 1924년 협성 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에 입학합니다. 처음에는 목회의 소명감에 별 흥미가 없었으나, 신학교 생활 중 만난 학우 이환신, 이호빈 등과의 교류는, 이용도로 하여금 교회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뜨거운 열의를 갖게 하였습니다.신학교 졸업 후 1928년 9월 감리교 목사 안수를 받고 강원도 통천지방으로 파송되어 첫 목회의 길을 나섭니다. 바로 그 때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중요한 영적 체험을 합니다. 즉 기도 중 마귀를 보고 마귀와 싸워 승리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 이용도는 분명히 달라졌습니다. 그의 가슴은 복음의 열정으로 가득 찼고, 그의 설교는 교리의 내용을 설명하는 것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눈물의 호소로 바뀌었습니다.그의 변화는 교회의 부흥을 가져왔고, 그의 이름은 복음으로 삶의 변화를 추구하려는 이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었습니다. 이용도가 가는 곳마다 눈물의 회개가 마룻바닥을 적시었습니다.

 그의 부흥운동은 여느 부흥회와는 다른 점이 많았습니다. “다만〔나는〕무(無)가 되라, 공(空) 이 되라. 그 위에 우리 주가 역사하시느니라”(이용도 목사 일기 125쪽, 이후 일기로 표기). 그의 일기가 말하듯, 이용도는 철저히 성령의 도구로 자신이 쓰여지기를 원했습니다. 어느 때에는 기도 중 성령의 지시가 없다는 이유로 부흥회를 취소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한마디의 설교 없이 ‘찬송으로만’, 또는 ‘기도하는 것으로만’ 부흥회를 이끌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웬일인지 부흥 회장은 회개의 눈물로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성령만이 주인되심을 고집하던 그의 부흥회는 방언이나 치유 등의 신비 현상을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회개하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가자는 것이 그의 메시지의 전부였습니다.  또한 그의 부흥회 설교 속에는 당시 교회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 깔려 있었습니다.

 벽돌로 담을 쌓고 울긋불긋 장식을 해 놓은 것, 이것이 교회가 아니에요, 이 예배당을 다 불살라 버리고 잿더미 위에서라도 몸과 마음을 아주 바쳐 참된 예배를 드려야 그것이 교회올시다. 신앙이나 사랑이란 내용은 하나도 없고 껍데기에 기관과 조직만 남아가지고서는 이것이 예수교회라고 전해서 남의 귀한 심령을 해치고 죽여버리는 것이 현대의 교회가 아닙니까?(이용도 목사 전기, 78쪽,  이후 전기로 표기)

 그의 이와 같은 신랄한 비판은 당시의 기성 교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결국에는 그로 하여금 시무 목사직을 사임하고 순회 부흥사의 길을 걷도록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성 교회 비판의 강도는 더 더욱 높아졌으며,  이에 상응하는 기성 교회의 대응도 강경해졌습니다. 장로교의 황해노회는 1931년 이용도에 대한 금족령을 내렸고, 「기독신보」는 이용도를 이세벨의 무리로 매도하였 습니다. 기성 교회의 이용도에 대한 매도와 이단시비는 결정적으로 한준명 사건에서 극에 이르게 됩니다. 당시 신비적 열광주의자로 알려진 한준명을 이용도가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용도가 한준명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사상에 동조해서가 아니라, 이용도 자신의 ‘무차별 사랑의 실천’ 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는 세상이 버린 사람, 세상에서 쫓겨나거나 몰려 나가는 사람을 받아 그와 함께 눈물을 흘리면서라도 함께 살려고 한다” (전기, 198쪽)는 이용도의 ’벽을 허무는 무차별의 인식에서 비롯된 삶의 존재 방식’ 을 기성 교회는 받아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끝내 1933년 감리교 중부연회로부터 휴직 처분을 받은 그는 원산의 한 허름한 집에서 투병(그의 지병인 결핵)과 기도 생활을 하다가 1933년 10월 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짧은 삶을 마감했습니다.

 

 

목사 개혁론


 

 지난 2천년 동안 교회는 성직자를 중심으로 지도세력이 절대적 헤게모니를 장악해 왔기에,  오늘날 교회의 부패와 무기력에 대한 일차적 책임이 목사에게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오늘의 한국교회의 비본질적 현상에 대한 책임이 ‘내 탓(목사의 잘못)으로’ 시인하는 목사들은 이용도의 목사 자격론과 목회론에 큰 감명을 받을 수 있기에 그의 생각을 빌려봅니다. 이용도는 목사가 되는 절대적 조건과 목회의 수단으로 믿음과 사랑의 실천을 꼽고 있습니다. “다른 일에는 몰라도 교역에는 신앙이 첫째 조건이고, 또 사랑이 그 수단이 되어야 할 것 아닙니까? 믿음과 사랑이 목사의 절대조건이 되어야 할 것이로소이다.”(일기, 25쪽) 이 단순, 담백한 말의 맛과 힘을 우리가 잊은 지 오래되지 않았습니까? 신앙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누구의 말을 빌린다면 “가치관의 중심”이요, “궁극적 관심”이 아닙니까? 내 삶 전체를 송두리째 맡길 수 있는 “가치관의 중심”, “궁극적 관심”은 곧 예수 그리스도가 아닙니까? 즉 예수의 삶 속에서, 예수의 교훈과 설교 속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에 코가 꿰어 내 삶 전체를 던져버리는 것, 이것이 곧 신앙이 아닙니까? 그리고 이미 예수를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내 설교와 삶을 통해 증언해 보자는 것이 목회가 아닙니까? 바로 이것이 목사의 근본적 자격이요, 목회의 도(道》라고 이용도는 말합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 목사들은 예수에게 흘려서 또는 끌려서 사나요? 예수가 우리 삶의 최고 가치로 자리잡고 있나요? 예수의 사랑이 오늘 우리를 살게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나요? “어찌하여 교회에서 네가 왕 노릇하려고 하며, 가정에서 네가 왕 노릇하려고 하며,  너를 네가 주관하려고 하느냐,  다만 예수가 있을 다름이니라”(일기, 52쪽) 이용도는 예수 중심이 아니라 자기 중심으로 사는 목사들을 이렇게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몸된 교회를 마치 자기 소유 물처럼 여겨 예수의 자리에 목사 자신이 앉아 있음에 분노합니다. 이런 병통은 이용도 시대 이 후에 전염병처럼 번져 교회가 목사의 사유화된 재산이 되는가 하면, 더 나아가 이제는 교회의 세습화(큰 교회의 아버지 목사가 자신의 아들 목사에게 그 직을 물려주는 것)가 한낮에 자행되는 것이 오늘의 한국교회 현실이 아닙니까? 이런 목사들이 요구하는 예수는 “肉의 예수, 樂의 예수, 富의 예수, 高의 예수”입니다. 그러나 이용도가 고백하는 예수는 “靈의 예수, 錢의 예수, 貧의 예수, 卑의 예수”입니다. 이용도는 우리에게 이렇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예수를 갖다가 너희 마음에 맞게 할 것이 아니라, 너를 갖다가 예수에게 맞게 할 것이니라”(일기,  101-102쪽)

 목사의 병을 후벼내는 이용도의 날선 칼질은 다음과 같은 말로 이어집니다. “악한 교회가 강단에서 교리와 신조를 설명하며 그것을 자랑으로 삼되 그리스도의 마음은 잊어 버렸구나”, “머리 부분으로만 따지고 꾸며 교회를 먹이려는 교역자들이여,  가슴에 피를 쏟아 생명으로 먹이어라' “교제에 동분서주하는 일이 있기 전에 먼저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여라”, 위험이나 고생을 두려워하면 목사 될 자격이 없다. 교회가 잘 안 되는 것은 목사가 평안을 취하려는 데서부터 시작된다. 목사가 군병같이 고생을 참고 나가면 그 교회는 승리한다“(전기, 113쪽; 일기, 101쪽) 교리신봉주의자들이 된 나머지 예수의 사랑 - 인간의 벽(있는 자와 없는 자/배운 자와 못 배운 자/남자와 여자/어른과 아이들/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을 허무는 무차별적 사랑 - 이 목사들의 차갑게 얼어버린 설교와 가르침에 대한 분노였습니다. 그렇다고 이용도가 반지성적/비이성적 신앙관을 주장했던 것은 아닙니다. “지식의 연료에 사랑의 불을 지르자”(이용도 목사 설교 집, 14쪽) 또는 “故로 그 知가 아무리 고상하더라도 愛가低劣하면 그는 卑劣한 人格이었나니라”(일기, 197쪽) 이상의 말과 같이, 그의 입장은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이룬, 사랑의 실천과 행위를 동반하는 지식을 외칠 따름이었습니다. 또한 목사에게 기도가 없기에 영적 빈사상태에 머물게 되고, 그러니 자연히 사랑과 용기가 식어 교회와 교인을 위한 필사의 목회보다는, 안락한 비극 속에 하루하루를 매너리즘으로 보내는 목회를 힐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기도하고서 하는 설교는 익은 설교요, 기도 안 하고서 하는 강도(講道)는 날강도”(일기,  123쪽) 밖에 될 수 없다고 기도로 무장한 목회를 이용도는 설파했습니다. 사실 그는 “기도에 미쳐 산 사람”이었고,  “木石도 눈물을 흘리게 하는 기도”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전기,  18,  17쪽).

 이용도의 목사론, 도는 그의 목회론은 한마디로 예수에 미친 믿음이요, 예수의 인간의 벽을 허무는 무차별 사랑의 실천이요, 이 모든 것의 원동력은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믿음운동이 회복된다면, 이 기도운동이 회복된다면, 우리네 목사들이 살 것이고, 우리가 살면 한국교회도 다시 한번 제 생명력을 회복할 것이고 역사의 파수꾼이 될 것입니다.

 

 

교회개혁론

 

 

 그러면 이용도가 미치도록 사랑하였고, 그의 젊은 생명을 바쳐 일하려고 했던 교회는 어떠했습니까? 1930년을 전후한 한국교회는 치명적으로 병든 교회였다고 이용도는 진단했습니다. 1927년 2월 9일 그의 일기는 이렇게 한국교회의 상황을 열거합니다. "한국교회는 부흥되어야겠다. 한국교회에 없는 것 : 기도, 개인전도, 열심, 사랑, 용기, 감사, 찬송, 협동, 성경공부, 구도심, 봉사, 가정기도. 한국교회에 있는 것 : 잔말 말질, 평론, 돈을 모으려는 생각, 게으름, 시비,  투쟁, 비겁, 공포, 불평,  근심, 걱정, 분열, 연문학, 구금심, 탐욕, 이기, 가정불안”(일기, 21쪽). 이런 중병을 앓고 있는 ‘한국교회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 되겠다”고 이용도는 입버릇처럼 걱정 하고 있었습니 다. 이용도는 자체적 생명력과 역사적 사명감을 상실한 무기력해진 한국교회의 재생은 부흥운동으로 가능하고,  또 부흥의 시작은 ‘회개’ 와 기도’ 와 사랑의 실천’으로 가능하 다고 보았습니다. 신조에, 조직에, 언론에, 그 무엇의 선구자보다 회개운동의 선구자가 조선에는 필요하다. 갱생을 초래하는 회개, 신생적 회개운동이 없다면 다른 모든 운동은 의미가 없다. 미구에 쓰러질 터인고로! 그래서 교계의 선구자는 완전한 신생자라야 한다. 죄에서 죽고, 의에서 난 자라야 한다.(일기, 63쪽)

 이렇듯, 교회갱신/교회개혁은 조직의 변화로, 교리의 현대화로는, 매스미디어를 선교의 매개체로 삼는다고 해서 이루어지는가? No! 단지 회개운동만이 교회를 살릴 수 있다고 이용도는 믿고 있었고, 그 회개운동을 위한 “미친듯이 부르짖는 광야의 소리”로서, 또는 “새 술에 취한 듯이 덤비는 사랑의 사도”로서 자기 삶을 바치기를 원했습니다(일기,  72쪽).

 아! 이 조선의 영들을 살펴 주소서. 머리 속에 교리와 신조 만이 생명 없는 고목같이 앙상하게 뼈만 남았고, 저희들의 심령은 생명을 잃어 화석이 되었으니 저의 교리가 어찌 저희를 구원하며 저희의 몸이 교회에 출입한다고 하여 그 영이 어찌 무슨 힘과 기쁨을 얻을 수 있사오리까? 교회의 표면에 쳐놓은 神聖의 幕, 평화의 포장을 걷어치우고, 그 내용을 들여다 보면 분쟁, 시기, 냉정, 貪利의 마(魔)가 횡행하오니 어찌 그 속에서 천국을 찾아보며 또 신성을 보겠나이까? 어서 주의 신령한 손이 임하여 주시고, 진리와 사랑의 성신이 충만히 임하여 주옵소서. 아멘.(일기,  222쪽)

 계층의 높고 낮음이나 많고 적음을 넘어선 만남이 있어 대화가 이루어지고,  그래서 얻어지는 갈등과 분열을 극복한 화해와 사랑이 강같이 흐르는 곳; 바로 이곳이 예배당인데 평화의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평화의 깃발이 나부끼는 곳이 예배당인데 --- 어찌하여, 염불에는 관심 없고 잿밥에 눈이 멀어, 감독/감리사가 되기 위해, 敎權을 잡기 위해, 교회를 여의도 마당밭보다도 더 지저분하게 온갖 오물(돈과 끈, 협박과 매수 등)로 더럽히고 있는 것이 오늘의 한국 교회의 현실이 아닙니까? 이렇듯 “신앙이나 사랑이란 내용은 하나도 없고 껍데기와 기관과 조직만 많고”, 더 나아가 하나님을 뵙는 예배당을 교회 정치꾼의 도박장으로, 교회 안에서 私利를 탐하는 장사치의 환전소로 바꾼 우리들을 향해 이용도는 회개를 촉구합니다. 회개가 없으면 예수의 피가 다시 흘려져야 하고 의인들의 피가 흘려져야만 한다는 그의 평양성의 “피의 설교”를 듣고 평양성은 가슴을 치며 통회했다는데 우리의 참회의 눈물은 언제나 터지려는지…

“아! 조선의 교회는 長監을 막론하고 그 정지가 가련하구나. 저희가 기도를 몰랐으니 어디 가서 신비한 은혜를 접할 기회가 있었으랴, 오! 주여 저희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일기, 123쪽) “웅변은 사람을 動케 한다. 그러나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動케 한다”(일기, 22쪽) 이용도는 기도의 중요성 - 즉 하나님의 은혜체험의 수단(the means of the divine grace) - 을 인정하고 강조한 것뿐만 아니라, 그는 기도로써 모든 것을 결정하였습니다. 기도 없이는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또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의 기도는 심장운동이라 낮과 밤, 산과 들판과 예배당 마룻바닥, 여름과 겨울, 즉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고 쉬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의 기도는 결사적이라 그 기도를 듣는 사람마다 뼈에 사무쳐 “아멘”을 낳게 하였습니다. 그의 집회가 있는 곳마다 기도의 불길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이 기도운동이 교회갱신의 불인데 우리도 잠에서 깨어 일어나 하늘을 우러러 우리의 참회를,  우리의 간구와 청원을,  우리의 감사와 서약을 드려야겠습니다.

“신앙으로 용기와 담력을 얻어 죄와 싸울 수 있고, 죄인을 책망할 수는 있으되 죄인을 긍휼히 여길 수 없음을 어찌하랴. 오! 주님이시여 나의 信이 愛에 있게 하옵소서”(전기, 141쪽) 여기서 이용도가 말하는 사랑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의미합니다. 그는 사랑은 혓바닥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손 끝과 발가락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사랑을 아는데 그치지 않았고, 그 실천에 그의 온 정력을 기울였습니다. “사랑은 사람의 생명이라. 고로 사랑은 곧 사람 그것이었습니다”(전기,  197쪽). 믿음의 마지막 단계는 곧 사랑의 화신이 되는 것이고, 바로 사랑의 실천이 사람의 사람됨(그리스도인의 그리스도인됨/그리스도인의 완전)에 이른다는 이용도의 사랑의 신학은 무차별적 예수의 사랑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의 실천운동이 교회갱신의 목적인데,  우리는 언제까지 자기 교인 늘려 돈 거두고 교회건물 세우는 데만 정신을 쏟으랴.

 

 

나가는 말

 

 

 목사가 목사됨을 위해 믿음의 회복이 문제라고, 교회가 교회됨을 위해 회개운동이 필수라고, 또한 목사가 목사로 살고 교회가 교회로 살기 위해 예수의 사랑을 실천하자고, 이용도는 목사갱신과 교회갱신의 지표를 설정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우리에게 무릎을 꿇는 생활을 요구합니다. 더 늦기 전에 이용도의 혼이 되살아나 한국교회가 생명력을 회복하고 주어진 역사적 사명을 감당하는, 살아 있는 성육화된 그리스도의 몸이 되기를 염원합니다. 요즈음 더욱 더 이용도가 그리워집니다. 끝으로 그의 좌우명 몇 개를 되새기며 이 글을 마무리하렵니 다.

-  苦는 나의 선생 : 고통이 올 때,  그것에서 배우는 것이 평안 할 때보다 더 많으며 또 참된 진리를 배 우게 됩니다.

-  貧은 나의 애처 : 가난함은 나의 사랑하는 아내같이 나를 떠나지 않나니 나는 건방진 富보다 착한 가난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  卑는 나의 궁전 : 나는 높은 데 처하여 있을 것이 아니라, 나의 마음은 늘 겸비하여 낮은 데 처해 있어야 됩니다. 그런고로 비천은 늘 내가 처하여 있을 궁전이 됩니다.

苦와 貧과 卑를 좋아하게 되면 다 되는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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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수


 

 

예수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다.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하여도 그저 예수뿐이 다.

생시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입어도 예수다!

그저 우리 생활의 중심초점은 예수뿐이다.

 

오— 예수는 곧 우리 모든 것의 모든 것이요 또 우리의 생명이다.

만일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이 생명을 잃어버리면 아무 이익도 없게 되는 것이다. 

오!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살지 못합니다.

오- 우리의 진리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오- 우리의 길이신 예수여 당신이 없어 우리는 행할 수 없습니다.

오,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여!

영원히 우리와 같이하여 주옵소서.

 

 

이용도 목사 <193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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